삶의 여유을 찾아/서울여행

흥선대원군의 자취를 찾아 거닐던 운현궁

무지개_느티 2011. 1. 18. 06:00

직원들과 함께 한 서울나들이

처음으로 들른 곳은 운현궁이다.

우리들은 2조로 나뉘어 운현궁에서 북촌한옥마을까지 가기로 했다.

먼저 선발조를 따라가 열심히 사진을 찍다 보니 일행들의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더니 다음 조가 오는 게 아닌가?

그때부터 천천히 문화해설을 들으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문화해설을 들으며 운현궁을 구경하니 훨씬 흥미로웠다,

 

노안당

운현궁의 사랑채이다.

 

운현궁에 당도하니 하마비가 대문 앞에 서 있다.

옛날엔 이곳에서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했다.

 

느티나무 잎사귀가 물들기 시작한다.

 

아주 열심히 문화해설을 듣고 있는 직원들

경청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때마침 노락당 과거제가 있었다.

 

 

운현궁에서 사랑채로 쓰였던 노안당은 대원군의 일상거처였으며 파격적인 인사정책, 중앙관제복구, 서원철폐, 복식개혁 등 국가주요정책을 논의했던 곳이다.

전형적인 우리나라 한식 기와집으로 처마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을 단 수법은 오늘날 이곳에만 남아있는 특징이다.

 

'노안당'이란 현판은 '노자(老者)를 안지(安之)'하면에서 딴 것으로 아들이 임금이 된 덕택으로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살게 되어 스스로 흡족하다는 뜻으로 흥선대원군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다.

 

말년에는 정권에서의 퇴진과 청나라에 납치되는 등 이곳에서 7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현재 노안당에 제시된 편액은 2006년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오옥진 각자장에 의해 모각되어 제시된 편액이며 원 편액은 서울역사박문관에 보관하고 있다.

 

 

 

아랫사람들이 묵었던 방

 

아랫사람들이 거처했던 곳

 

봉사식

봉사식은 흥선대원군의 아들을 왕으로 정하는 교서를 받는 의식으로 영의정과 도승지가  참여한 가운데 치러졌다.

고종은 복건에 청도포를 입고 백사대를 착용하였다.

흥선대원군은 흑단령을 영의정 김좌근은 조복을 도승지 민치상은 청단령을 착용하였다.

  

봉사식

 

 

마루가 썩거나 하면 하나씩 갈아 끼울 수 있다고 합니다.

 

난을 그리고 있는 흥선대원군

 

 

 

 

 

 

 

 

 

 

 

노락당

예전엔 혼례를 올릴 때 여자집에서 혼례를 올렸는데 고종임금과 명성황후는 운현궁에서 혼례를 올렸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은 며느리를 뽑는 조건으로 처가가 번성하지 않고 인물이 그리 예쁘지 않을 것이며 머리가 그다지 명석하지 않을 것

이 세가지를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명성황후께서는 절대로 어리석고 우매하지 않았으니.........

 

상궁의 청록색 당의

나인의 저고리, 치마

 

 

 

 

낙성식 축하 다례연

운현궁을 보수할 때 은자가 대량으로 나왔다고 한다.

지금도 집을 지을 때 어느 집에선 보석을 넣는다고도 한다. 뒷날 집을 보수할 때 자손들에게 보탬이 되도록 하기 위한 배려라고 한다.

 

 

 

가마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살아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의 집과 1910년대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 본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을 합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한옥은 제일 앞 남쪽에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이 자리잡고, 뒤쪽인 북쪽으로 행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으며 북쪽에 안채인 노락당이 자리잡고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고,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0여년간 정치를 하면서 세도정치의 폐란을 제거하고 인사·재정들에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하였고,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경북궁을 다시 짓기도 하였다.

지금은 궁의 일부가 덕성여자 대학으로 사용되고 있고 방송국 시설이 있기도 하다. 이로 인해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도 헐려 나가고 영화루와 은신군·남연군의 사당도 모두 없어졌다.

 

 

 

' 자다가 봉창두드린다.'라는 말이 있다.

위 사진이 봉창이다. 이 창은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창이라 한다.

 

운현궁에 담이 쳐져있다. 어떤 이는 풍수지리에 의하면 담을 치면 기운이 쇠해 운현궁은 쇠락할 것이고 담 밖의 집은 흥할 것이라는 설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운현궁은 차츰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담밖의 집은 어느 법조인이 샀다고 한는데 그 집안은 매우 흥했다고 하니 그냥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어째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