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지문을 지나 조금 걸어 내려가면 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를 건너 언덕으로 올라가면 내가 자취하던 집이 있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자취하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옥천암이 있고 '백불'도 있었는데 나는 옥천암도 백불도 오늘 처음 본다.
늘 앞만 보고 옆도 돌아보지 않는 성격탓에 오가는 길만 신경쓰다 보니 이렇게 가까운 곳에 문화재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꽤나 꼭 막히고 융통성이 없었던 것 같다.
"예전에 나는 이랬었다."라고 하면 지금은 모두들 거짓말이라고 한다.
세월이 많이 지났고 많은 것을 겪고 다져져서 그럴 것이다.
그 동안 살아온 길에 공짜란 없는 것 같다.
늘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느끼고 .변화하고 ,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참, 많이도 변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7호, 고려시대
이 불상은 옥천암 경내의 홍지문(弘智門)을 지나 냇가에 높이 10m 바위에 5m 크기로 관음보살의 앉아 있는 모습을 새겨 넣은 것이다. 금색의 관을 쓰고 흰 칠을 해 놓아서 백불(白佛)이라 불리는데, 해수관음(海水觀音)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백불을 보호하기 위하여 정면 1칸 측면 2칸의 보도각(普渡閣)을 세워 놓았는데, 전면이 개뱡되어 있어 밖에서 볼 수 있다.
불상은 바위 왼쪽의 약간 평평한 면을 이용하여 새겼는데 (호분(胡粉) :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흰 가루, 백분)과 금분(金粉), 검은 색 등을 칠하여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 머리에는 꽃무늬가 장식된 높은 삼면관(三面冠)을 썼는데 아래쪽 좌우로 뿔 같은 것이 뻗어 나와 그 끝에 크고 복잡한 장식이 달려 있다. 머리카락은 어깨를 따라 팔꿈치 부분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비교적 둥근 편으로 눈이 가늘고 입이 작아 고려시대 일반적인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몸틍은 단정한 편으로 전체에 걸쳐 부드러운 옷주름이 흘러내리고 있다.
조선 태조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 이 마애불에 기원을 했다고 하며 조선 말기 고종의 어머니인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閔氏)도 이 석불 앞에서 아들의 복을 빌었다고전해진다.
옥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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