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제19대 숙종-익릉(원비 인경왕후)

무지개_느티 2009. 8. 28. 19:40

 2009.8.2

서오릉 견학

익릉을 보다.

익릉은 서오릉에 있는 능들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익릉은

정자각으로 가는 참도가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정자각으로 가는 길

 

 홍살문과 정자각

 

 

 숙종의 명에 따라 능이 간소하게 조성됨. 숭릉의 양식을 따름

 

 

 

 인경왕후의 능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

능호 : 익릉
위치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지정번호 : 사적 제198호
조성시기 : 1680년(숙종 6)
능의구성
익릉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단릉이다. 봉분에는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다른 왕릉과는 조금 다르게 석주가 아닌 동자석 상단부에 십이간지를 글자로 새겨 놓았다. 문석인은 조관을 쓰고 있으며, 두 손으로 홀을 쥐고 있다. 뒷면의 관대에는 꽃문양이 보인다.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어 표정이 살아 있다. 짧은 목에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턱을 홀 바로 위에 올려 놓은 형상이다. 무석인은 투구에 있는 상모를 뒤로 넘겼다. 갑옷의 어깨 부분에는 아주 작은 도깨비 문양을 넣었고, 소매는 활동하기에 편리하도록 터져 있다. 흉갑 부분은 구름으로 장식되어 있다. 대부분의 석물이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왕릉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정자각은 능침 언덕 아래에 있다. 현종의 숭릉 정자각과 같이 당시 유행하던 익랑이 딸려 있는 것이 특이하다.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의 참도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참도 중간에 계단을 두어 지형에 따라 설치하였다.
능의역사

1680년(숙종 6) 10월 26일 인경왕후가 승하하자 현재의 위치에 능호를 익릉이라 하여 조영하였다. 숙종 연간에는 왕릉의 능제를 단순화하고 석물을 간소하게 제작하도록 명하였으나, 그 이전에 조영된 능이므로 기본적으로는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르고 부분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생몰년도 : 1661년 ~ 1680년
생애이야기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로 1661년(현종 2) 9월 3일 태어났으며, 10세 때인 1670년(현종 11)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어의동 별궁에 들어갔고, 이듬해 4월에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1674년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조선 19대 왕으로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20세 때인 1680년(숙종 6) 10월에 천연두 증세를 보이며 앓기 시작했다. 전염을 우려한 숙종은 경덕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였으며, 인경왕후는 발병 8일 만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두 명의 공주가 있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일화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는 왕비의 자리에 오르고 머지않아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된다. 그 이후 당파 싸움과 맞물려 숙종을 둘러싼 궁중여인들의 암투가 구중궁궐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데, 이러한 현실을 소설화한 것이 『사씨남정기』이다. 사씨남정기의 저자는 당대 내로라하는 벼슬길에 오르다 남인의 탄핵으로 인해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김만중이다. 관료이자 학자였던 그는 바로 인경왕후의 숙부이다.
김만중은 유배 생활 중에 『사씨남정기』이외에도 여러 편의 글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어머니 윤씨 부인의 일대기를 그린 『윤부인 행장』도 포함되어 있다. 이 글에는 인경왕후가 어렸던 시절, 친할머니인 윤씨 부인의 손에서 길러졌는데, 그 행실을 반듯하게 가르친 덕에 세자빈에 간택되었을 때 주선하고 응대하는 것이 어른 같아 궁중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따랐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