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유을 찾아/경기도여행

정조의 효성이 깃든 화성의 용주사

무지개_느티 2009. 12. 2. 06:20

 

 

 

용주사(龍珠寺)는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의 능사(陵寺)로서 1790년에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실질적 창건이라고 할 만하다. 절이 세워진 자리는 신라 때 창건된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였다.
 
정조가 처음 절을 짓고자 장소를 물색하였는데 당시의 신하들이 이 갈양사터가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고 하였다. 이에 이곳에 절을 새우고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게 하니, 비로소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된다.
 
갈양사터는 천여 년 전인 신라시대 때 이미 부처님의 복전(福田)이 가꾸어졌던 곳이다. 그러나 갈양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다만 신라 말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세였던 염거화상(廉巨, 또는 廉居, ?~844)이 창건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신라 말 고려 초라는 격변의 시기를 살면서 선승으로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혜거국사(惠居國師, 899~974)가 머물기도 하였다. 혜거국사에 대해서는 최근에 그의 비인 「고려국수주부화산갈양사변지무애원명묘각흥복우세혜거국사법휘지광시 홍제존자보광지탑비명병서(高麗國水州府花山葛陽寺辯智無碍圓明妙覺興福祐世惠居國師法諱智光諡 弘濟尊者寶光之塔碑銘幷序)」가 알려지면서 자세한 행장을 알게 되었고, 갈양사의 모습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즉 스님은 갈양사를 고려왕실의 원찰로 삼을 것을 왕에게 아뢰기도 하였고, 말년에는 이곳에 혜거헌(惠居軒)이라는 승방을 두어 하산소(下山所)로 삼아 지냈었다고 한다.

 

 

 가을이 점점 깊어간다.

 

 

삼문을 통해 들어가는 경내 입구는 단풍과 낙엽으로 유명하다

 돌과 기와로 쌓은 담이 정겹다.

 

 

 국화향기가 그윽한 화단

 

 

홍살문

왕실의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입구에 붉은 칠을 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문이다.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었던 이유는 정조대왕께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護聖殿)을 건립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용주사에서는 사도세자와 경의황후(혜경궁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일 년에 여섯 번의 재를 모셔 왔다 한다. 그러나 1907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로 중단되어 왔다. 100년 만에 사도세자 제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고, 호성전의 현판을 제막하는 것은 효찰대본산 용주사 창건 당시의 모습을 회복하여 우리나라 효문화를 선양하는 한편,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못 다한 혼정신성의 효를 사후에라도 실천하고자 하였던 뜻을 계승하고자 함이다

 

삼문

절의 첫 입구인 일주문을 지나면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삼문을 맞게 됩니다. 마치 양반집 대가 같기도 한 이 건물은 좌우에 줄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으로 사도세자 현륭원의 재궁(齋宮)으로 지어진 절이기 때문에 이러한 건축양식을 지닌 것 같습니다. 동서의 옆문과 중앙의 대문에 각각 문이 나 있어 삼문이라 부르며 정면 도리 위에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글씨로 '龍珠寺'라는 현판이 자리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글씨가 인상적이며 오른쪽 옆문에는 '中央禪院'의 현판이 세로로 걸려있습니다. 삼문의 네 기둥은 상단부는 목재이고 하단부는 석재의 초석인데 유난히 높고 큰 편입니다. 네 기둥에는 '龍珠寺佛'의 네 자를 각각 첫 글자로 한 시구가 주련으로 걸려있는데 역시 안순환의 글씨입니다.

용이 꽃구름속에 서리었다가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이 내용은 정조가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꾼 후 절이름을 용주사라고 하였다는 연기와 상통합니다. 삼문 앞에는 화마(火魔)를 물리친다는 석조 해태상 두 마리가 버티고 서있으며, 간결하고 굵게 처리한 조각기법이 해학적으로 나타나 우리 민족의 여유있는 정서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삼문은 창건 당시에 세워진 건물로 여러 차례의 개수를 거쳐 현재는 15평이고 좌우의 행랑은 총 40평에 달합니다.

 

 화단을 아름답게 잘 가꾸워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무리지어 핀 들꽃이 가을의 정취를 더욱 느끼게 한다.

 

 용주사 삼문

 

 

 

대웅보전

용주사의 가람구조에서 가장 중심되는 곳.

흔히 사찰내에서 중심되는 부처님을 모신 건물을 대웅전이라 부르는데 정확한 의미에서 보면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곳을 가리킵니다.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부를 때 '대영웅 석가모니'라하고 줄여서 '대웅'이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이 계신 곳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용주사는 '대영웅 석가모니불을 모신 보배로운 전각'이라는 뜻에서 대웅보전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대웅보전은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유서깊은 건물인데, 보경당(寶鏡堂) 사일(獅馹)스님이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를 맡아 대웅보전을 비롯한 145칸의 전각을 함께 지었습니다.

 

 

 

범종

사원건물에서 쓰는 종을 가리킵니다. 절에서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거나 모든 이에게 때를 알려주는 것이었다가 그 소리가 신묘하여 예불의식 등에 쓰이게 되었는데 범종의 소리는 중생의 마음 속을 깊이 울려 어리석은 몸과 마음을 자비로운 부처님의 품으로 이끌게 합니다. 이처럼 종소리만 들어도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자라난다고 하여 종소리 자체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대웅보전의 계단을 올라 왼쪽을 향하면 정면에 법고각과 마주 보고 있는 범종각이 있습니다. 1911년 무렵에는 보신각(普信閣)이라고 하였으며, 이 전각안에 있는 범종은 국보 제12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법고각

대웅보전 왼쪽에 위치하는 단칸 3평의 아담한 건물로 내부에 북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법고는 홍고(弘鼓)라고도 하며 보통 북이라고 합니다. 북은 예불과 의식에 쓰이는 사물(四物)의 하나로서 짐승세계의 중생들을 위하여 소리를 냅니다. 또한 북소리가 널리 퍼져나가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 모든 이에게 참다운 이치를 전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북은 조석예불에 쓰이므로 대개 사물과 함께 보관되나 용주사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법고각과 범종각이 마주보고 서있습니다. 이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지옥중생을 위한 범종, 축생을 위한 북, 물고기를 위한 천보루의 목어, 그리고 하늘의 조류를 위한 만수리실의 운판이 함께 어우러져 온갖 중생을 지혜의 세계로 인도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인지 용주사에는 늘 각종 새가 끊이지 않고 날아듭니다.

 

호성전

정조대왕께서는 일반적인 제사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던 듯 현륭원 옆에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하고, 대웅보전 옆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각으로 호성전을 건립하였다. 호성전은 팔작지붕의 궁궐형식으로 지어진 전각으로서 사도제자의 위패를 모셔두고 매일 새벽, 한낮, 해질녘, 초저녁, 한밤중, 자정 이후 등 여섯 번의 재를 올렸다.

 

 

 

 부모은중경판

 

 

지장전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사찰의 건물을 명부전이라 합니다.

그 내부에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어서 시왕전이라 하기도 하고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다고 해서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