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8일
융건릉 견학
융건릉은 몇 번 와 봤지만 산책하기에도 좋고
역사 속 인물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서 좋다.
사실 오늘 가려고 했던 곳은 용문사였다.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은행나무도 찍고 가을 단풍도 찍을 겸해서.
그러나 대가족이 움직이다 보니 일정이 늦어지고 또 부모님과 함께 움직이다 보니 산책하기에 좋은 융건릉으로 노선을 바꿨다.
이른 아침 청주에서부터 수원까지 일찌감치 서둘러 오셨다고 한다.
여동생 식구들, 남동생 식구들, 부모님과 우리집 5가구가 움직인셈이다.
먹을 것은 차 안에 두고 융건릉 견학을 마치고, 관리사무소에 부탁해서 잠시 주차장으로 가서 점심 도시락을 가지고 왔다.
큼지막한 박스에 밥과 반찬을 담고 보온병에는 된장국까지 끓여 넣고 과일, 커피, 과자 등 다섯 집에서 가져 온 음식이 제법 푸짐했다.
무거운 음식을 옮기는 데에는 두발 달린 손수레를 이용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며 "계하는 날인가봐." 한다.
이 소리를 듣고 피식 웃었다.
신성한 장소에서 먹는 점심식사라 색다르다.
식사하기에 좋은 솔밭에 돗자리를 펴고 맛나게 점심식사를 한다.
어린 조카들은 넓은 공간에서 마음껏 뛰어다니며 행복한 가을 소풍을 즐긴다.
덩달아 어린 아이처럼 신이나 저절로 입가엔 미소가 가득하다.
함께 한다는 것이 이렇게 사람을 즐겁게 한다.
번거롭지만 도시락을 준비해서 음식을 함께 나눠 먹고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간단하게 사 먹으면 될테지만 준비해 온 점심을 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랑과 정성이 담뿍 든 도시락에 덕에 마냥 행복하다.
우리는 융건릉 가는 입구에 조성된 숲 속에서 식사를 했는데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능가끼이에서 돗자리 펴고 떠들며 식사하는 몰지각한 사람들로 인식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식사를 한 곳은 지정된 장소이니 비난하지 않으시기를.......
뒷정리 또한 말끔하게 하고 왔다. 티 하나 없이.
숲 사이로 난 산책로를 걷는 게 마냥 행복하다. 향긋한 솔향기도 그만이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무덤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 하였고, 1899년에 의황제로 봉해졌다. 이때 혜경궁 홍씨도 의황후로 봉해졌다.
융릉은 원래 양주의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다. 합장릉인 융릉은 병풍석을 세우고 모란과 연꽃무늬를 새겼다. 석등은 전기의 8각형과 숙종, 영조대에 등장한 4각형 석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으로 건릉과 예릉의 기준이 되고있다. 무덤의 석인도 사실적이고 예전에 가슴까지 숙여진 머리가 들려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내며, 문인석에서는 머리에 금관을 쓴 예가 나타나고 있어 19세기 이후의 무덤 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온갖 정성을 기울여 창의적으로 만들었다.
갈대가 가을의 정취를 뽐내고 있다.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그의 부인인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이다.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많은 인재를 등용하고, 조선 후기의 황금문화를 이룩하였다.
건릉은 현융원의 동쪽 언덕에 있었으나 효의왕후가 죽자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하였다. 무덤은 한 언덕에 2개의 방을 갖추었으며 난간만 두르고 있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융릉의 예를 따랐다. 혼이 앉는 자리인 혼유석이 하나만 있으며, 융릉과 같이 8각형과 4각형을 조화시켜 석등을 세웠다. 문무석은 사실적이며 안정감이 있는 빼어난 조각으로 19세기 무덤의 석물제도의 새로운 표본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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