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유을 찾아/경기도여행

세마대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오산의 독산성

무지개_느티 2009. 12. 4. 06:26

 

독산성은

독성산성(禿城山城)이라고도 하며, 삼국시대에 축조되었던 옛 산성을 조선시대에 수축하여 이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는 도성(都城)의 문호와 관련된 전략상의 요충지로 남한산성과 용인의 석성산성((石城山城) : 보개산성(寶盖山城)) 등과 연계하여 도성을 에워싼 형세를 이루는 중요한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 백제(百濟)가 쌓았던 성으로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 이용되었다. 1593년(선조(宣祖) 26) 7월에 전라도 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權慄)이 근왕병(勤王兵) 2만인을 모집하여 북상하다가, 이 성에 진을 치고 왜적 수만명이 길을 나누어 노략질하는 것을 차단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듬해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불과 4일만에 백성들이 합심하여 수축을 하였다. 이와 같은 민정모입(民丁募入)에 의한 구제(救濟)와 설진련병(設鎭鍊兵)을 통한 산성 수축을 동시에 해결하는 독산성의 예는 이웃에 모범을 보여 금지산성(衿之山城)에서도 군량을 모으고 병사를 훈련시켰으며, 이어 월계산성(月溪山城)과 파사산성(婆娑山城)으로까지 퍼졌다. 1595년 포루(砲樓)의 시설이 갖추어지고, 1597년 2월에는 왜병의 조총을 방어하기 위하여 평평한 집을 성벽 안에 짓고, 거기에 성의 아래로 향한 창문을 시설하며, 석차(石車)와 포차(抛車)를 배치하고, 성밖에는 목책을 세우려고 계획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 성의 중요성이 강조되자 1602년(선조(宣祖) 35) 수원부사 변응성(邊應城)이 수축하고, 1796년(정조(正祖) 20) 수원읍성인 화성(華城)의 축조와 함께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의 성의 둘레는 1,800보(步)이며 4개의 문이 있었다. 성벽은 외면이 장방형 내지 방형이 되도록 다듬은 석재로 약간의 기울기가 있도록 쌓아 매우 견고하다.

그러나 물(정천(井泉))의 부족이 대군의 주둔을 어렵게 하여, 이 산성의 가장 큰 결점으로 지적되고 있었다. 물의 부족은 세마대(洗馬臺)의 전설을 낳았다. 즉 1593년 권율 장군이 주둔하고 있을 때, 가토(加藤淸正)가 이끈 왜군이 이 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 보내 조롱하였다. 그러나 권율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백마(白馬)를 산 위로 끌어 올려 흰쌀을 말에 끼얹어 목욕시키는 시늉을 하였다. 이를 본 왜군은 산꼭대기에서 물로 말을 씻을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고 오판하고 퇴각하였다고 한다.

 권율 장군의 지략이 돋보인다.

 

 한적하게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누구를 기다리니나?

 

 사찰 안 구절초가 가을 풍경을 곱게 색칠한다.

 

 

 

 

 

 

 

 

 

 

 

 

 

 

 

 강아지풀이 가을색을 물씬 풍기기에 한 컷

 

 산국의 그윽한 향이 참 좋다.

 

 흐드러지게 핀 구절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