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산사가 오늘따라 사람들로 붐빈다.
초파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이 많다.
주지스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서 있는 불자들의 모습이 진지하다.
나도 함께 서서 좋은 말씀을 듣고 싶었으나 여기저기 사진을 찍기에 분주했다.
무량사는 몇 번 온 적이 있다. 언제 와도 좋은 곳이다.
문화재도 많아서 볼거리가 아주 많은 곳이며 계곡도 아름다워 사람들에게 몸과 마음의 쉼터를 제공해 준다.
초록이 짙어 아름다운 계절 5월에 찾은 무량사는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다.
자 이제부터 무량사의 이곳저곳을 구경해 볼까요?
아울러 문화재 공부도 해 봅시다.
주지스님의 말씀에 경청하는 불자들
무량사 극락전(보물 제 356호, 조선시대)
무량사는 신라 말에 범일이 세워 여러 차례 공사를 거쳤으나 자세한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신라말 고승 무염대사가 일시 머물렀고, 고려시대에 크게 다시 지었으며, 김시습이 이 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 건물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흔치않는 2층 불전으로 무량사의 중심 건물이다. 외관상으로는 2층이지만 내부에서는 아래·위층이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트여 있다. 아래층 평면은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기둥 사이를 나누어 놓았는데 기둥은 매우 높은 것을 사용하였다. 위층은 아래층에 세운 높은기둥이 그대로 연장되어 4면의 벽면기둥을 형성하고 있다. 원래는 그 얼마되지 않는 낮은 벽면에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창문을 설치했었는데 지금은 나무판 벽으로 막아놓았다.
아미타여래삼존상을 모시고 있는 이 불전은 조선 중기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낸 불교 건축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우수한 건물이다.
무량사 일주문
무량사 들어가는 입구에 초록이 짙어 더욱 신선한 느낌을 준다.
계곡의 물을 보니 그저 발이라도 적시고 싶어진다.
많은 이들의 소망을 담아 돌을 하나하나 쌓아놓았다.
이제 거의 다 왔군요.
숲 속엔 다람쥐도 살고 여기저기 이름모를 꽃도 피어나 존재의 이유를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답니다.
당간지주(시도유형문화재 제57호, 고려시대)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는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의 양쪽에 서서 이를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있으나 대부분 두 기둥만 남아 있다.
이 당간지주는 무량사 천왕문 동쪽에 남아 있는 것으로, 두 개의 길다란 돌기둥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기둥 끝은 안쪽면에서 바깥쪽으로 둥글게 다듬었고, 앞뒷면의 가장자리에는 테두리 선을 돌렸으며, 양 옆면 가운데에는 세로로 돌출된 띠를 새겼다. 마주보는 기둥의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2개의 구멍을 각각 뚫어 놓았다. 돌기둥 사이에는 당간 받침돌이 끼워져 있는데, 그 중앙에 당간을 받는 기둥자리를 파고 그 주위를 둥글고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통일신라시대에서 굳어진 제작방식을 따라 고려 전기에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무량사 천왕문
무량사 경내
여기저기 무량사 경내를 카메라에 담느라 다들 바쁘군요.
경내에 가득 걸린 연등이 알록달록 예쁘네요.
무량사 석등(보물 제 233호, 통일신라)
무량사 법당 앞뜰에 세워져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네모난 바닥돌 위로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받침돌은 연꽃 8잎이 조각되어 있고, 가운데받침은 기둥으로 길게 세워져있으며 그 위로 연꽃이 새겨진 윗받침돌이 놓여 있다. 화사석은 8면 중 4면은 넓고, 4면은 좁은 형태로, 넓은 4면에 창이 뚫려 있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의 치켜올림과 처마의 경사가 잘 어울려 경쾌한 모습을 보여 주며, 꼭대기에는 자그만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전체적으로 지붕돌이 약간 큰 감이 있으나 경쾌한 곡선으로 인해 무거움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래·위받침돌의 연꽃조각은 통일신라 전성기의 화려한 연꽃무늬와는 차이가 있고, 각 부분이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만들어진 시기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인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무량사5층석탑(보물 제185호, 고려시대)
무량사 극락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웅장한 모습의 5층 석탑이다.
탑을 받치는 기단(基壇)은 1단으로, 둥글게 다듬은 두툼한 석재를 포함한 층단으로 괴임을 만들고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세웠다. 탑신(塔身)은 지붕돌과 몸돌을 한 층으로 하여 5층을 이루고 있다.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있는 몸돌은 지붕돌에 비하여 높이가 낮은 편이나 전체적으로 알맞은 비례를 보이고 있어 우아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다. 지붕돌과 밑의 받침은 딴 돌로 구성되어 있고 받침의 수는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낮은 받침돌 위로 머리장식의 일부가 남아있다.
백제와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조화시켜 만든 고려 전기의 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백제의 옛 땅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백제의 기법이 이어졌고 통일신라의 시대적인 양식도 계승되었다.
해체공사를 할 때 탑신의 1층 몸돌에서 금동제 아미타여래좌상,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의 삼존상이 나왔고, 3층에서는 금동보살상, 5층에서는 사리구(舍利具)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무량사 명부전(문화재자료 제 389호, 조선시대)
무량사 극락전
은은한 단청과 곡선의 미가 돋보이는 아름다운 극락전이다.
무량사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 1565호, 조선시대)
부여 무량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중층전각으로 이루어진 극락전의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는데, 17세기 대규모 사찰에서 널리 조성되었던 대형의 소조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삼존상은 아미타·관음·대세지라는 분명한 아미타삼존 도상을 보여주고 있고, 이미 발견된 복장발원문을 통해 현진(玄眞)이라는 조각승과 1633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어 조선후기 조각사 연구는 물론 조각 유파 연구에도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거대한 규모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불신의 전체적인 모습이 도식적으로 단순화된 감이 있으나 양대 전란 이후 자존심과 자신감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던 당시 불교계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전반기 대형불상에서 삼신 또는 삼세불상이 결합된 삼존형식이 대부분인 가운데, 극락전의 주존으로 아미타·관음·대세지보살이 결합한 삼존도상의 드문 예로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
무량사동종(시도유형문화재 162호, 조선시대)
산사의 모습이 다정하고 아름답다.
김시습영정(시도유형문화재 64호)
매월당 김시습(1435∼1493) 선생의 초상화이다.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사람이며 조선 전기의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학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금오신화』를 남겼을 뿐 아니라 그의 저작은 다채롭다고 할 만큼 조선 전기의 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교·불교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으며 15권이 넘는 분량의 한시를 남겼다.
비단에 채색하여 그려 놓은 이 그림은 조선 전기 사대부상 중의 하나로,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 야인의 옷차림에 패랭이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옅은 살색으로 맑게 처리하였고, 윤곽선과 눈·코·입 등은 옅은 갈색으로 그렸다. 의복은 옅은 홍색인데 필요한 부분만 약간 짙은 갈색으로 묘사했다. 이로써 얼굴과 의복을 옅은 살색과 그보다 약간 짙은 갈색을 대비시켜 조화있는 화면을 만들었다. 수염은 회색 바탕에 검은 선으로 섬세하게 그려, 당시 초상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조선 전기의 초상화는 현재 몇 점 밖에 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도 원본을 본 떠 그린 것이거나 덧칠을 한 것이 많은데 이 초상화는 원본 그대로 남아있어 귀중한 작품이다. 그의 저서인『매월당집』에 의하면, 김시습은 생전에 두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 그림이 그 자화상인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약간 찌푸린 눈매와 꼭 다문 입술, 눈에서 느껴지는 총명한 기운은 그의 내면을 생생하게 전하는 듯하여 초상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원통전
촘촘히 매달린 연등은 많은 이들의 소망을 담아 오래도록 불밝히리라.
부도군
어느 스님의 무덤일까?
가운데 우뚝 솟은 부도가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사리를 모신 부도이다. (시도유형문화재 제25호)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 분으로, 21세 때에 수양대군(후의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불교에 입문하여 만년을 무량사에서 보내다 입적하였다.
부도는 아래에 3단을 이루는 기단(基壇)을 마련하여 그 위로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올렸는데 모든 부재의 단면이 8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은 위 ·아래받침돌에 연꽃을 장식하고, 가운데받침돌에는 구름에 쌓인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을 새겼다. 탑신의 몸돌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연꽃덮개가 조각된 지붕돌은 꽃장식이 달린 여덟 귀퉁이가 높게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과 보주(寶珠:꽃봉오리모양의 장식) 등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부도로, 당시의 작품으로는 조각이 매우 우수하고 화려하다. 일제시대 때 폭풍우로 나무가 쓰러지면서 함께 넘어졌는데 그 때 밑에서 사리 1점이 나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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