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보양조장 사장 장기서씨는 고 장인환씨의 둘째아들로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수안보양조장을 이어가고 있다.
아버지 장인환씨는 충청도 지역에서 양조장을 하던 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장인환씨는 그의 형과 함께 15살부터 막걸리를 배달했고 온 청춘을 막걸리에 다 바쳤다.
1921년 출생하여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면서 일제가 세금징수를 위헤 1909년 주세법, 1916년 주세령을 내려 규모와 시설을 갗추지 못한 술도가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술도가에 닥친 첫번째 잔혹사이다.
1935년 장인환씨와 그의 형은 충주의 한일양조장에서 술 배달을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걸어서 배달하다 나중에 자전거, 마차로 배달하였다고 한다.
1950년대는 전국적으로 양조장 숫자가 줄었지만 막걸리 등 전통주가 우리나라 주류의 70%를 육박할 정도였기에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그는 매포양조장을 운영한 지 3년 만인 1958년 충주 목행양조장을 인수하였으며 1963년 수안보 로얄호텔 뒤 현재 수안보양조장의 전신인 상모양조장을 인수하였다.
상모양조장이 워낙 영세하여 인수 후 막걸리 제조 항아리를 모두 큰 것으로 들이고 국세청 검증을 받았는데 그때가 1963년 7월 11일이다.
장인환씨는 목행양조장과 상모양조장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1966년 일죽양조장을 인수하고 1969년 평택영천양조장을 인수 매각, 1972년 용인 원삼양조장을 인수하여 세상 떠나기 직전 처분하게 된다.
1965년 전통주 막걸리는 두번째 시련을 겪는다.
박정희 정부 때 쌀로 술을 빚는 것을 금지하는 양곡관리법을 시행하여 밀가루로 막걸리를 만들게 되어 품질이 떨어져 막걸리를 마시면 머리가 아픈 증세가 생겼고 발효를 촉진하기 위하여 카바이트를 사용한 '카바이트 막걸리', '사카린막걸리'가 유통되면서 비위생적인 싸구려 술로 인식돼 수많은 양조장들이 문을 닫았고 전통술의 명맥이 끊겼다.
1974년 향년 54세의 아까운 나이로 장인환씨는 세상을 떠나고 그때부터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막 직장을 구한 사회초년생으로서
급작스런 아버지의 별세 이후 둘째아들인 장기서씨가 가업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장기서 대표는 28세에 그렇게 수안보양조장 사장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977년 쌀로 막걸리를 만들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일시적인 해프닝으로 유야무야되고 시장은 여전히 밀막걸리로 이어갔다.
수안보에 각종 온천장이 들어서면서 온천원수가 부족해 위기가 닥쳤다. 장기서 대표는 1983년 수안보온천에서 3㎞ 쯤 상류의 물이 맑고 풍부한 수회리로 양조장을 이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80년 막걸리 양조장은 1,000여 곳에 불과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막걸리업계는 운영할만 했다고 한다. 다만 더 멀리 배달해야되는 수고를 겪어야 했지만.
1993년 대대적인 통일벼 소비정책에 따라 통일벼로 막걸리를 빚었는데 썩은 쌀도 있었고 도정한 지 오래된 쌀이라 막걸리 맛이 떨어지고 발효가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몇 해 못가 통일벼로 막걸리를 빚는 건 중단되었다.
2000년대 세 자릿수로 된 막걸리 양조장은 2007년 778곳으로 집계되었으며 ,장기서 대표도 2004년 목행양조장의 막걸리 제조를 중단하고 '충주탁주' 브랜드를 수안보양조장으로 가져와 지금에 이어오고 있다.
우여곡절이 많은 술이 막걸리다.
우리의 아픈 역사와 함께해 온 전통주이다.
웰빙바람을 타고 막걸리 열풍이 불면서 조금이나마 양조장이 새로 생겨나고 있지만, 대기업의 대량생산품의 저가 융단폭격에 소규모 양조장들은 맥을 못추고 있다.
우리의 전통주, 몸에 좋은 전통주 막걸리를 오랫 동안 맛보려면 우리가 우리 것을 사랑해야겠다.
아픔 많은 양조장의 부흥을 기대해 본다.
수안보양조장
한 때는 직원이 10여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사모님과 배달 직원 몇명 두고 운영하고 있다.
오래된 항아리 속에서 술이 익어가고 있다.
막걸리의 효능을 잘 읽어 보세요.
그리고 많이 애용해 주세요.
장기서 대표
지난 시절의 역사를 들려주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한다.
입국실
입국만들기: 입국은 미생물 곰팡이를 번식시키는 것인데 온도와 습도를 맞추고 균일하게 하는데 중요하다. 요즘은 기계식으로 하지만 전통양조장에서는 일일이 사람이 한다.
입국만들기
입국실
섭씨 32도가 넘는다. 숨이 막힌다.
1차 발효
천연암반수와 입국을 적절한 비율로 항아리에 담는다.
4~5일 정도 발효시킨다.
효모와 효소가 왕성하게 확장되는 과정이다.
항아리별로 발효되는 시간에 따라 거품이 일고 끓는 소리나 모습이 다르다.
보글보글 잘 끓고 있다. 발효가 잘 되고 있음.
2차발효
1차 발효가 충분히 된 항아리에 술밥(밀, 쌀)과 물을 넣는다.
술밥의 전분(녹말)은 미생물 곰팡이의 효소에 의해 담화를 이룬다.
만들어진 당은 미생물인 효모에 의해서 에탄놀화된다.
발효된 것을 찌꺼기를 걸러 내면 막걸리가 된다.
이것은 찹쌀로 빚은 술이다.
막걸리, 동동주의 맛이 좋으려면 쌀이 좋아야한단다.
찹쌀로 빚은 동동주는 이 통으로 하나면 30만원 정도 한단다.
찹쌀 동동주를 한 말 사려면 10만원 정도 한단다.
1963년 7월 11일 들여온 항아리다.
지금은 이런 항아리를 구할 수가 없단다.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다고 한다.
모든 게 사라진다. 안타까운 항아리 제조 전통의 맥이 끊긴 샘이다.
수기로 된 오래된 장부 속에 세월이 녹아 있다.
이 물이 천연암반수이다. 이곳은 물도 흔하고 물맛도 좋다.
막걸리 시음
사모님께서 손수 담근 김치와 된장, 고추가 안주이다.
어떤 이는 김치맛이 좋다고 김치를 팔라고 한다.
월악산 온천 명주 生막걸리
세월의 때가 묻은 감사장
동동주, 막걸리, 옥수수막걸리까지 맛보았다. 술맛을 잘 모르는 나이지만 술이 술술 넘어간다.
맑고 깨끗한 맛이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랄 때 이웃 아저씨나 할아버지께서 늘상 막걸리를 드셨다. 힘든 일을 할 때나 밭두렁에 앉아 새참을 먹을 때도 늘 함께했던 막걸리.
지금도 술도가와 노랑 막걸리 주전자가 눈에 선하다. 우리 안집 할아버지는 여름에 막걸리를 밥에 말아 드셨었다. 그러면 힘도 나고 밥이 꼬들꼬들하다면서 막걸리를 많이 사랑하셨다. 안주는 새우젓과 풋고추에 된장이 전부였다.
소박한 삶을 사시던 우리네 부모님 세대,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의 모습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막걸리 시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중을 나오신 장기서 사장님 내외분
수안보 양조장
소박한 삶 속에서 꿋꿋이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분들이 있어 행복하다.
이분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는 건 우리의 몫이다.
전화번호: 848-3365
택배로도 맛좋은 막걸리를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삶의 여유을 찾아 > 충청도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안보여행]옛길 따라서 자연과 벗하며 천천히 천천히 걷는 재미 (0) | 2010.08.28 |
---|---|
[수안보여행]충주호에서 즐기는 낭만여행 조정체험 (0) | 2010.08.19 |
[수안보여행]중원미륵리사지에 전하는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슬픈 전설 (0) | 2010.08.19 |
[수안보여행]수안보 벼룩시장과 웰빙온천 수안보하이스파에서 찾은 여유 (0) | 2010.08.12 |
[수안보여행] 추억의 잔치국수맛 상록호텔의 사과국수와 대학옥수수 (0) | 2010.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