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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보여행]중원미륵리사지에 전하는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슬픈 전설

무지개_느티 2010. 8. 19. 11:36

무심한 세월 따라 절은 온데간데 없고 절터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돌과 탑, 석등, 석불입상이 등이 이곳이 절터였음을 말해 준다.

이 절은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중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 덕주사를 창건하여 남향한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하였고, 마의태자는 이곳에 석굴을 창건하고 불상을 북쪽으로 두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전한다.

나라 잃은 설움이 얼마나 컸으며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한이 얼마나 컸을까? 전설이라지만 너무도 가슴아픈 사연이다.

 

 미륵리사지 전경

 

 

 

 미륵리석불입상(보물 제96호)

 

고려 초기 이 부근에서 많이 만들어진 일련의 커다란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을 같이하는 석불입상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말 마의태자가 나라의 멸망을 비통하게 여기며 이곳까지 와서 불상을 만들고 개골산으로 들어갔으며, 그 여동생은 덕주사마애불(보물 제406호)을 만들었다고 한다.
모두 5개의 돌을 이용하여 불상을 만들고 1개의 얇은 돌로써 갓을 삼았다. 둥근 얼굴에 활모양의 눈썹, 긴 살구씨 모양의 눈,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 등은 고려 초기 커다란 불상의 지방화된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신체는 단순한 옷주름의 표현이라든가 구슬같은 것을 잡고 있는 손의 묘사 등에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간략함을 느낄 수 있다.
이 불상의 대담하고 거대한 모습으로 보아 새로 일어난 국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온 정성을 다해 절을 하고 있다. 마음 속 간절한 염원을 안고.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제 95호)

이 곳에는 고려시대의 석불과 석굴이 만들어졌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앞쪽에 석등과 더불어 이 석탑이 남아 있다.

석탑은 기단부(基壇部)의 아래부분이 땅 속에 파묻혀 있어서, 그 구조가 어떤지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드러난 부분은 자연석에 가까운 네모난 돌로 특별하게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그 위로 기단의 맨윗돌이 올려져있다. 탑신(塔身)은 1층 지붕돌이 2장일 뿐 몸돌이나 다른 지붕돌은 모두 1장의 돌로 되어 있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몸돌의 넓이에 비하여 좁은 기둥을 모서리에 새겼다. 지붕돌은 급격하게 좁아져 석탑 전체의 균형과 미관을 손상시키고 있다. 지붕 밑면의 받침은 5단이지만 추녀가 짧아서 6단인 것처럼 보인다. 처마는 수평이고 지붕돌의 경사는 매우 급한데 귀퉁이의 치켜올림은 거의 없는 편이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는데, 노반은 6층 지붕돌로 보일 만큼 큼직하고, 복발은 반원 모양이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의 중심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긴 쇠꼬챙이모양의 찰간(擦竿)이 남아있다.

5단의 지붕돌 밑면받침과 직선의 처마는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인데, 지붕돌의 급경사와 형식적인 기둥새김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

 

 

 

 미륵리석등(유형문호재 제19호)

미륵리 석등은 8각으로 지대석만 4각구조인데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우수한 작품이다.

 

 

 연화문 당간지주

연화문이 아름다운 당간지주로 우리나라에서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와 미륵리사지 당간지주만이 연화문 당간지주라 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석물

 

 

 

 

 

 

 

 

 무엄한 고추잠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