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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여행] 이목대와 오목대를 찾아 조선왕조의 뿌리를 만나다.

무지개_느티 2010. 11. 16. 19:03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인 전주향교를 둘러보고, 전주향교 앞뜰의 멋스러운 은행나무를 카메라에 담고  언덕길을 올라간다.

그곳이 어디인 줄도 모르고 앞서 가는 이를 따라 그저 걷는다.

날씨가 더워 반소매 차림이 딱 좋을 듯 하다.

전주향교에서 오목대 가는 길에  내려다 본 전주시내는 고풍스러움을 더해 준다. 

이목대와 오목대는 나즈막한 야산에 있는데 조선시대 왕실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 유적지이다.

 

 이목대

이목대는 태조의 5대조인 목조 이안사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으로, 고종이 직접 쓴 비문을 통해, 조선 왕조의 시조인 이안사가 이곳에 살았었음을 알게 한다. 조선시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유적지는 조선 왕조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가치 있는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오목대 가는 길

이 계단을 오르면 이목대가 나온다.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다정히 걷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 정겹다.

 

 오목대

오목대는 고려 우왕 6년(1380)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이성계장군이 개선길에 군사를 이끌고 잠시 쉬어가던 장소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광무 4년(1900)에 고종이 직접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 (太祖高皇帝駐畢遺址)”라는 비문을 새겨 놓은 비를 말한다.

  

 이목대

 

 

 오목대 가는 길에 내려다 본 전주시내의 모습

여기저기 보이는 한옥이 고풍스럽다.

 

 

계단을 따라 걷다 보면 이목대가 나온다.

 

 파란하늘에 양털 구름이 멋스럽다.

 

 까치밥으로 하나 남은 감이 늦가을의 정취를 말해 준다.

 

 붉게 물든 단풍도 가을의 멋을 더해 준다.

 

 이목대를 다녀 내려가는 길에 내려다 본 한옥마을

축제기간이라 사람들이 많다.

 

 기와 지붕이 멋지다.

 

 

 

 이 곳으로 내려왔다. 이곳에 오르면 전주한옥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목대에 얽힌 역사이야기 속으로 잠시 들어가 보자.

 

고려말 일본의 정치·정세가 극도로 혼란한 틈을 타 왜구들은 한반도에서의 노략질이 극심하였다. 이 시기에 고려는 전국적으로 피해를 입었는데,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역의 피해가 가장 심했다. 이 지역은 해안뿐 아니라 내륙지방까지 왜구의 발길에 짓밟혔다. 왜구는 수도 개경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강화 교동(喬桐)과 예성강까지 나타났다. 이에 고려정부에서는 최영(崔瑩)·이성계·나세(羅世)·최무선(崔茂宣)·박위(朴葳) 등으로 하여금 이들을 무찌르게 했다.

   

1375년(우왕 1) 대대적인 왜구의 침략에 맞서 최영은 홍산(鴻山)에서 적을 쳐부수고 대승을 거두었지만 침입은 계속되었다.

 

1380년 8월 왜구는 손시제(孫時制)를 우두머리로 하여 500여 척의 배를 타고, 금강 어귀에 있는 진포(鎭浦 : 지금의 서천)에 상륙했다. 고려정부에서는 나세·심덕부(沈德符)·최무선을 지휘관으로 삼아 왜구를 치도록 했는데, 최무선이 화약을 사용하여 적의 함선을 모두 불태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왜구들은 배를 잃어버려 바다로 나갈 수 없게 되자 경상도 상주·구미, 충청도 옥천 등 내륙지방으로 들어가 더욱 잔인한 약탈과 살상을 자행했다. 이에 고려정부는 이성계를 최고 지휘관으로 삼아 쳐부수도록 했다. 왜구는 경상도 상주·선산·경산부(지금의 星州) 등을 차례로 노략질하고 지리산 근방의 사근내역(沙斤乃驛 : 함양)에 집결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쪽의 정산봉(鼎山峰)으로 나아가 이지란(李之蘭)과 더불어 악전고투한 결과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이 싸움에서 고려는 왜구의 말 1,600여 필을 얻고 기타 무기도 많이 노획했는데, 이를 황산대첩이라고 한다.

   

황산에서의 대승을 거둔 이성계는 돌아가는 길에 이곳 오목대에 들러 종친들을 모아놓고 전승 축하연을 배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