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8일
융릉을 견학하다.
역사 속 사도세자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남동생이 사도세자와 정조임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능의 구조와 건축양식 , 지붕 위 장식 등도 설명하고 있다.
남동생과 함께하면 귀가 호강한다. 남동생은 문화답사기행을 많이 다니고 건축을 전공해서 아는 것이 많다.
능호 : 융릉 |
위치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1-1 |
지정번호 : 사적 제206호 |
조성시기 : 1789년(정조 13) |
능의구성 |
융릉은 훗날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훗날 헌경의황후로 추존된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다. 합장릉이면서 혼유석은 하나이다. 융릉은 세자의 묘인 원의 형식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상계 공간과 하계 공간으로 나누어 공간을 왕릉처럼 조영하였다. 병풍석을 설치하였으나 난간석이 없으며, 병풍석 덮개의 12방위 연꽃 형의 조각은 융릉만의 독특한 형식이다. 상계에는 능침, 혼유석,망주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하계에는 문무인석, 석마가 배치되어 있다. 장명등의 8면에 조각된 매난국의 무늬는 매우 아름답다. 공간 구성 상의 특이점 중 또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다.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홍살문의 오른쪽에는 원형의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풍수적 논리에 의해 조영되었다고 한다. |
능의역사 |
1762년 5월 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장헌세자는 그해 7월 23일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하였다. 1776년 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여, 아버지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789년(정조 13)에는 영우원을 현륭원으로 고치고 능을 현재의 위치로 천장하였다. 1815년(순조 15) 12월 15일에는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하여, 이듬해인 1816년(순조 16) 3월 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1899년(광무 3) 11월 12일 고종은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리고, 능 이름을 융릉이라 했으며, 12월 19일에는 묘호를 장종에서 장조로 바꾸고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라 했다. 경기도 양주군 남쪽 중랑포 배봉산에 있었으나, 정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으로 올리고, 1789년 현재의 위치로 묘를 옮긴 후 능호를 융릉으로 바꿨다. |
생몰년도 : 1735년 ~ 1762년 |
생애이야기 |
장조는 조선 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22대 정조의 생부이다. 1735년(영조 11) 1월 21일 영빈 이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효장세자(추존왕 진종)가 요절하였으므로, 2세가 되던 해인 1736년(영조 12) 3월 15일 왕세자에 책봉되고, 1744년(영조 20) 10세의 나이로 영의정 홍봉한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3세가 되었을 때 이미 『효경』을 외울 정도였으며, 수시로 글을 쓰고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다양한 방면에서 왕세자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갖춰 부왕인 영조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1749년(영조 25) 1월 23일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그를 경계하는 노론 및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모함을 하여 영조와 세자 간의 갈등이 비롯되었다. 1762년(영조 38)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던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하는 상서를 올리자 크게 노한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세자가 명을 따르지 않자 폐서인한 후 뒤주에 가두어 8일만에 숨지게 하였다. 이 때 세자의 나이는 28세였다. 영조는 자신의 행동을 곧 후회하고,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
일화 |
『영조실록』1762년(영조 38) 5월 13일의 기사에는 아버지인 영조가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게 되는 비극의 시작이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나경언이 고변한 후로부터 임금은 세자를 폐하기로 결심하였다. 임금은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에게 휘령전에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서 사배례를 마치자, 궁성문을 굳게 막고 사람의 출입을 금한 후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의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세손이 들어와 관과 포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은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군병을 시켜 신하들을 내쫓게 하였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한림 임덕제마저 강제로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세자는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곡하면서 따라 나오며 말하기를,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 하고, 전문에서 나와 춘방의 여러 관원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물었다.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빈궁, 세손 및 여러 왕손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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