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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여행]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져 간 호국사찰 개태사지

무지개_느티 2010. 4. 9. 09:21

개태사를 보고 바로 뒤쪽에 있는 개태사지를 찾았다.

개태사는 앞에서 설명하였듯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세력을 완전히 물리친 후, 태조 23년(940)에 지은 절이다.

 

  당시 절 안에는 태조의 초상화가 있어서 나라에 전쟁의 기미가 있으면 그 앞에 기원문을 올려 나라가 태평하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절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왜구의 빈번한 약탈에 의해 차츰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위치는 세종 10년(1428)에 옮겨진 것으로, 개태사 안에는 개태사지삼존불상(보물 제219호)이 있고, 이외에도 석탑과 쇠솥이 있다. 전성기에 장국을 끓였다고 전해지는 이 쇠솥은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에 이를 정도여서 수백명의 승려가 기거했다는 전설을 사실로 뒷받침하고 있다.

 

  건물 자리와 주춧돌, 석조, 불상의 대좌, 죽대들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반자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절터에 있었던 석조불좌상 1구는 상방산의 한 암자에 안치되어 있다.

 

  개태사터 일대는 삼국시대 후기 신라군이 당과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략할 때 통과한 진격로로, 백제의 계백 장군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근처 황산벌에서 신라와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장소로 유명하다. 그후에도 군사·교통의 요충지로 주목을 받았던 곳이다. 또한 주변에는 사찰을 지키기 위해 만든 약 6㎞에 달하는 토성이 있다. 
 

 

문화재자료 제275호 개태사석조 

개태사의 옛 터에 남아 있는 것으로, 스님들이 사용하는 물을 담아두던 도구이다.

사찰 부엌에서 물탱크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 개태사의 옛 터인 마을 안길의 땅속에 매몰된 상태로 보존하고 있다. 그 크기가 거대한 것으로 알려져 절에서 쓰던 둘레 9.4m의 개태사 철확(철솥)과 함께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다. 또한 원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 개태사터의 역사를 살피는 데에도 좋은 자료가 된다.

 

 

 

 

 

 

 여기저기 절의 흔적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