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여행] 정겨운 농촌 풍경, 풍습-광주시립민속박물관
박물관에 들르면 시간이 정지된 듯하다.
과거의 익숙한 모습에 넋나간 듯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어린 시절을 두메산골에서 지낸 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정겨운 물건이나 풍경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편안해진다.
추억 속의 정겨운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고 그 때 그 시절로 추억여행을 할 수 있기에 더더욱 좋다.
오늘은 어린 시절 농촌에서 자랄 때 보던 익숙한 풍경들을 모아보려 한다.
"이려~~~~~"
농부아저씨 소를 몰며 논밭 갈던 소리 귓전에 맴을 돈다.
소가 "음머~" 하며 힘겨운 발걸음 옮길 때 소는 '참, 힘들겠다.' 했었다.
큰 눈을 껌뻑이며 말없이 논밭을 다 갈아내던 소는 농부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친구였다.
초가집이 모여있던 농촌 마을에 초가지붕이 없어지고 슬레트지붕으로 교체되던 때가 지금도 생각이 난다.
아침마다 이장댁 스피에선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새벽 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하며 들리던 새마을 노래.
그때 마을 사람들은 일찍 일어나 마을 청소를 했었고 아이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었다.
포근하고 정겨운 초가지붕이 사라지고 멋없는 슬레트지붕으로 교체되고 나니 외풍도 심하고 한겨울에 구들장은 따뜻했지면 윗 공기는 차가워 방 안에 놓은 걸레가 뻣뻣했었다. 옷을 잔뜩 껴 입고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자던 어린 시절.
그래도 그때가 참 행복했었다.
걱정거리가 없었으니........
우리 할머니 시집살이 하시면서 집안 일 하시랴 길쌈베 짜시랴, 나무해다 때시랴, 새벽밥 해서 자식들 먹여 보내시랴, 수면시간이 4시간도 되지 않으셨던 그런 고단한 생활을 하셨노라 늘 말씀하셨었다. 할머니,큰할머니, 시할머니, 증조할머니의 도단함이 밴 베틀.
마음이 아려온다.
다듬이 방망이질
똑딱~~~
다듬이 방망이 소리 들린다.
광목이불을 바싹 말리기 전에 눅눅한 상태로 착착 개어 방망이질을 하셨던 우리엄마.
그땐 방망이질 소리가 경쾌하니 참 좋았었다.
금방 풀먹여 덜말린 상태로 다듬이 방망이로 두드려 널어 말렸다가 이불홑청을 씌우면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들리고 그 빳빳한 이불이 좋아 뒹굴던 그때 참으로 행복했었다.
우리 할머니 쓰시던 반닫이농과 농 위에 반짇고리로 쓰시던 상자가 눈에 익숙하다.
한겨울 화로도 외풍이 많던 방안의 온도를 높이고 심리적으로 따뜻하게 해 주었던 정겨운 물건이다. 전기가 없던 시절 등잔불도 오랫만에 보니 참 좋다.
농한기엔 방 안에 앉아 농부아저씨들 가마니나 멍석을 짜곤 하셨었다.
시골 대장간은 시골에서 농사일을 할 때 쓰던 낫, 호미, 곡괭이 등을 만들어 내던 소중한 곳이었다.
이 풍경은 익숙지 않다. 용두레로 물을 퍼 올려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자라던 마을엔 봇물을 이용해 논에 물을 대곤 했다. 지금은 모터를 이용해 호스로 물을 끌어 올린다.
세월이 참 많이 좋아졌다.
도리깨로 곡식을 털 던 모습
마당에 천막을 깔아 놓고 콩, 팥을 널어 놓고 도리깨도 탁탁 내리치면 콩이며, 팥이며 이리 튀고 저리 튀고 했었다.
대장간의 모습
디딜방아
우리집 아래집에 있던 디딜방아
지금도 방아찧던 소리 들리는 듯하다.
농삿일에 반드시 필요하던 똥지게
시골에 가면 봄날 과수원, 밭에 거름을 내서 바람이 불면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었다.
안집할아버지 똥지게 지고 화장실에 똥을 퍼 나르신 후면 어머니께서 막걸리 대접을 하셨었다.
고단함 뒤에 막걸리 한 사발에 흐뭇해 하시던 안집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농기구들
고무레는 확실히 생각이 난다.
바닥에 널어 놓은 벼이삭을 말릴 때 고무래로 골고루 펴 가며 말렸었다.
체 안에 나물이며 찐 고구마를 가늘게 썰어 말려 장독대 위에 올려놓았던 생각도 난다.
그때 삐들삐들 말리던 고구마는 쫄깃쫄깃하고 당도가 높아 아이들의 간식으로 사랑받았다.
큰집 대청에 가면 쌀항아리와 뒤주 등이 있었다.
헛간에 가면 농기구들이 가득 했었 다.
달구지
아들을 기원하던 어머니들
지금은 이런 분 드물 것이다.
삼신상
아이 낳을 때 차려놓던 삼신상
남동생이 태어나고 할머니께선 머리맡에 미역국과 밥을 차려 놓으시고 '"먹고자고 먹고 놀고 오뉴월 오이크듯 무럭무럭 자라게 해 주시고 , 미련한 인간은 그저 아무것도 모르오니 몰러라고 마시옵고 그저그저 보살펴 주옵소서."
자는 동생의 머리맡에 앉으셔서 새벽마다 빌고 비시던 내 할머니.
어느날 삼칠일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할머니께서 이웃집에 물을 길러 가셨다가 가마솥에 부글부글 끓던 닭계장을 보시고 오셨는데 , 남동생이 그날 밤 잠을 자지 않고 자지러지게 밤새 울었다 한다. 할머니께서는 닭부정이 든 것 같다시며 안집할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안집할메니께선 조카인 이웃집 아저씨에게 가셔서 가서 목욕재계 하고 빌라고 하셨단다. 아저씨 말씀이 "아, 우주선이 달나라에 가는 세상인데 별소리를 다듣겠네요......."
그래도 안집할머니께서 집요하게 설득하셔서 이웃집 아주머니, 아저씨 내외분께서 목욕재계 후 오셔서 빌고비셨다고 한다. 그랬더니 남동생은 울음을 그치고 쌔근쌔근 자더라고.
늘 아이가 태어났을 때 삼칠일 동안 다른 이들의 출입과 부정한 살생 등을 피하고 늘 경계하고 삼가하라고 하셨던 내 할머니.
할머니의 기도 덕택에 동생은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그 동생도 어느덧 40을 훌쩍 넘어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7일이 되면 이레상을 차려놓는다. 우리할머니께선 집에서 떡도 잘 하셨었다.
엄마가 떡을 못하셔서 할머니께선 웃으시며" 떡은 네 엄마가 참, 잘하지." 하셨었다.
아, 그리운 할머니
돌이 되면 수수팥떡에 백설기에 떡을 잔뜩 하셔서 아이가 잘 자라기를 기원하셨었다. 실타래를 갔다 놓고 아이가 수명 장수 하기를 기원하셨지.
증조할머니께선 큰아저씨 돌날 성이 각각 다른 사람들의 쌀을 얻어다가 떡을 하여 지나가는 이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며 100명에게 떡을 나누어 주면 아이가 잘 자란다고 하여 그렇게 정성을 들이셨다고 늘 말씀하셨었다.
오줌싸개 어린이들에게 키를 뒤집어 씌워 소금을 받아오라 시켰었다.
예전엔 집에서 모두 아이를 낳았다.
동생이 태어나던 날 골목에 나가 동생이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었다.
음력 5월 7일 남동생이 태어났는데 어린애가 어찌나 코도 오똑하고 똘망똘망 예쁘게 생겼던지 동생을 업고 나가겠다고 떼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때가 초등하교 2학년쯤 됐던 것 같다.
씨름판
설날 지나서 널뛰기를 많이 했었다.
강강술래는 추석 때 많이 했었다.
느티나무에 그네를 매고 단오날 그네뛰기를 많이 했었다. 심술궂은 동네 오빠를 발판을 나무 구멍 뚫린 곳에 집어 넣어서 그네를 못 타게 했었지.
설날에 윷놀이를 많이 했었다.
'잠자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라'했던가.
예전엔 마을에서 굿을 많이 해서 굿판이 벌어지면 구경을 가곤 했었다.
무당의 요령소리 들려오는 듯하다.
겨울철 물레방아 속에 들어가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 손과 발을 이용해 굴리던 생각이 난다. 물론 물레방아가 이보다 훨씬 더 컸었다.
언제나 돌이켜 추억하면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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