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유을 찾아/충청도여행

[제천여행]청풍문화재단지의 고풍스런 멋을 찾아서

무지개_느티 2011. 7. 17. 20:14

 

청풍문화재단지는 정부의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으로 충주다목적댐 공사가 1978년 6월부터 시작하여 1985년 10월준공되기까지 수몰지역내의 산재되어 있는 문화유산을 1983년부터 3년여에 걸쳐 1만 6천평의 부지위에 원형대로 이전 복원하여 1985년 12월 23일 개장하였다.

청소년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으며, 지금은 8만 5천평의 규모로 확대 개발되어 우리시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관광지로 발돋음하고 있으며 보물 2점(한벽루, 석조여래입상), 지방유형문화재 9점(팔영루, 금남루, 금병헌, 응청각, 청풍향교, 고가4동), 지석묘, 문인석, 비석등 42점과 생활유물 2천여점이 보관되어 명실상부한 옛 남한강 상류의 화려했던 문화의 산실로 자리잡고 있다.

이곳 문화재는 직접 생활하거나 사용하던 것으로써 타 지역과 차별화되고 있으며 계속하여 놀거리, 볼거리, 먹거리장을 보완하고 있다.

 

한벽루

 

이 건물은 고려 충숙왕 4년(1317) 당시 청풍현 출신 승려인 청공이 왕사(王師)가 되어 청풍현이 군(郡)으로 올려지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객사의 동쪽에 세운 건물이다. 원래 위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댐을 세우면서 1983년 청풍면 물태리로 옮겨 세웠다.

구조는 앞면 4칸, 옆면 3칸의 2층 누각과 앞면 3칸 옆면 1칸의 계단식 익랑 건물이 이어져 있다.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하였으며 사방에 난간을 둘렀다. 건물 안에는 송시열의 편액과 하륜의 기문이 있다.

누의 공포는 이익공(二翼工)이고 익랑은 초익공(初翼工)이며, 누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나 익랑은 부연이 없는 홑처마이다. 누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나, 동측 합각 밑을 가리기 위해 우물천장을 일부 가설하였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6년(1406)에 군수 정수홍(鄭守弘)이 인조(仁祖) 12년(1634)에 군수 권경이 중수(重修)하고, 고종(高宗) 7년(1870)에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중수하였으며, 1972년 8월 19일 수해 때 붕괴된 것을 1976년 4월에 다시 복원(復元)하였다. 밀양의 영남루(보물 제147호), 남원의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함께 본채 옆으로 작은 부속채가 딸려 있는 조선시대 누각 건물의 대표적인 예이며, 세 건물 가운데 가장 간결하고 단아하다.

 

 

 응청각

 

조선시대 관아의 누각건물로 19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청풍현 객사 누각인 한벽루 옆에 나란히 세워졌던 2층 누각이었는데, 충주댐 공사로 인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앞면 3칸ㆍ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1단의 기단 위에 세웠는데, 1층은 둥근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를 흙벽으로 막아 창고로 사용한 듯하다. 2층은 앞면만 둥근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네모 기둥을 세웠으며 난간을 둘렀다. 동남쪽으로 3단의 나무계단을 설치하여 오르내릴 수 있게 하였다.

건물(建物)의 구조(構造)는 1고주5량(一高柱五樑)이며 기둥머리에 쇠서(牛舌)가 1개 달린 초익공계(初翼工系) 건물이다. 홑처마 합각(合閣)지붕을 한 비교적 소박한 누각이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랄 때 쓰던 정겨운 물건이 다 있다.

옛날로 시간여행을 잠시 떠나본다.

 

 

지개를 보니 그 옛날 어르신들께서 나무하고 물길어 나르고 하던 고단한 삶의 모습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장독대엔 비맞은 항아리들이 추억 속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참으로 정겹다.

눈내리는 날엔 소복이 쌓인 장독대 위 눈을 뭉쳐 동생들과 함께 한꺼번에 아버지에게 눈을 던지며 눈싸움하던 생각이 난다.

옛 것을 보면 자꾸 그시절이 그리워 지는 건 왜일까?

 

팔영루

이 누문(樓門)은 조선(朝鮮) 숙종(肅宗) 28년(1702)에 부사(府使) 이기홍(李箕洪)이 남덕문(覽德門)이라고한 그 터에 고종(高宗) 7년(1870)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다시 중수(重修)하였다. 팔영루는 청풍부(淸風府)를 드나드는 관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북측의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면 성누문(城樓門)답게 홍예(虹예)를 쌓은 높은 대(臺) 위에 우뚝 서 있다.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난간(欄干)을 둘렀으며, 고종조(高宗朝) 부사 민치상(閔致庠)의 청풍팔경(淸風八景)을 읊은 팔영시(八詠詩)로 하여 팔영루(八詠樓)라 하였다. 충주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인 청풍면(淸風面) 읍리(邑里)에서 1983년 현위치로 이전하였다 문화재/관광지 의림지, 박달재자연휴양림, 무암사, 정방사, 월악산국립공원 음 식 점 청풍면 소재지에 유명횟집이 많아 싱싱한 향어회와 매운탕의 얼큰한 맛이 유명하다. 숙 박 문화재단지 10km이내인 금성면의 뉴월드장(043-648-3843~4), 수산면의 수산관광농원 여관(043-648-2277), 수산면 능강리의 능강콘도미니엄(043-648-0480~3)등

 

팔영루

 

 

비가 촉촉이 내리는 고가에 서서 추억에 잠긴다.

비 때문일까? 고가와 비오는 날의 풍경이 운치있다.

 

뒷문을 열어 놓은 사이로 금방이라고 옛날 어릴 적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숨결이 들리는 듯하다.

벽에 걸어놓은 다래끼를 둘러메고 안집 할머니를 따라 산으로 더덕, 도라지 등을 캐러 다니던 초등학교 시절 생각이 난다.

 

나무절구에 벼이삭, 보리이삭을 주워오면 어머니께서 빻아서 학교에 가지고 가던 때도 생각난다. 그시절엔 방과후에 아이들이 돈이나 밭으로 나가 벼이삭, 보리이삭을 주워 학교에 가져가곤 했었다.

 

이 다래끼 참 정겨운 물건이다.

 

맷방석에 콩이며 팥이며 담아 널어 놓던 때가 생각난다.

모두 지나간 추억거리를 제공하는 소중한 물건이다.

 

연자방아

 

비맞은 사립문도 참 정겹다. 예전에 시골에서 살 때 우리집 대문도 사립문이었다.

 

 

베틀

시할머니께서 손이 다 돌아가도록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짜셨다던 고생스럽고 청춘을 다 바친 한많은 물건이다.

 

관아

 

정겨운 탈곡기도 보인다.

직장 동료 아버님께서 고안해 내신 탈곡기라고 한다. 그리 들으니 물건에 더 애착이 간다.

어릴 때 어르신들께서 보리며 볏단을 손에 쥐고 발로 열심히 페달을 밟으면 통이 굴러가면서 신기사게도 곡식의 낱알을 털어냈었다.

뽀얀 먼지를 날리며 곡식의 낱알이 분리되어 나오던 광경을 마냥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었다.

 

저 멀리 퇴주가 보인다. 어릴 적에 큰집에 가면 퇴주에 곡식이 그득했었다.

퇴주를 보니 참 반갑다.

 

퇴주에 곡식을 담을 때엔 널판지를 하나하나 뜯어내고 곡식을 채우면서 하나하나 다시 끼워 맞추곤 했다. 퇴주를 지나면 사랑방이 나타났었는데 머슴아저씨가 새끼꼬고 농사일도 거들곤 했었다. 지금은 다 사라진 옛이야기가 되었다.

 

성혈

 

청풍석조여래입상

보물546호, 고려시대

청풍면 읍리 대광사 입구에 있던 이 불상은 충주댐 건설로 인한 수몰로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전체적인 조각양식을 볼 때 10세기 무렵의 작품으로 보인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매우 작아서 우뚝해 보이며 사각형의 얼굴은 후덕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가늘면서도 두툼한 눈, 넓적한 코, 뚜렷한 인중은 자비로운 부처의 풍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

두 귀는 양 어깨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고 목에는 3개의 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옷주름이 두껍게 처리되어 신체의 윤곽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다. 허리에는 치마를 묶은 띠매듭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아래로는 U자형의 주름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흘러 내리고 있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서 손가락을 구부렸고, 왼손은 늘어뜨려 손가락을 펴서 밖으로 내보이고 있다. 불상으로부터 3m쯤 떨어진 곳에 방치되어 있는 원래의 대좌는 8각의 연화좌로 각 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청풍문화재단지에 가면 우리선조들의 삶과 지난 시절의 추억을 함께 맛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