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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여행] 꿈 속에 그리는 그리운 그곳에는 -부흥리 3구 분저울

무지개_느티 2011. 8. 16. 23:33

2011년 8월 14일

꿈에 그리던 그리운 고향 같은 그곳

충북 괴산군 청안면 부흥리 3구 분저울

이곳에서 난 10년간 살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내가 살던 집이며 학교에 오가던 오솔길

다문다문 선 느티나무 등

모두다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 서 있다.

 

그러나 세월의 변화를 그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내 나이도 어느덧 중년

머리엔 희끗희끗 서리가 내리고 오랜 만에 찾은 분저울에도 변화가 느껴진다.

냇가에 줄지어 서 있던 느티나무 몇 그루 보이지 않고, 그네 뛰고 놀 던 느티나무는 가지치기를 해 앙상하고

추억 속 물레방아는 아직도 돌고도는데........

 

그리운 분들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는다.

심성도 외모도 곱디고우셨던 동네 큰집아주머니는 아직도 다정하시던 그 모습 그대로 내게 남아있건만 사시던 옛집 흔적조차 없고

내가 살던 집 또한 흔적도 없다.

그래도 변함이 없는 것은 집 앞 개울가에 서 있던 느티나무다.

 

봄날 연분홍색으로 피어나던 살구나무도, 가을날 아침 알밤이 툭툭 떨어져 이슬머금은 알밤을 줍던 행복을 안겨주었던 밤나무도 사라지고 없다.

 

 

냇가에 서 있는 느티나무는 그래도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마을회관 앞 밭이었던 곳에는 예쁜 집이 지어져 있고

 

 

 백일홍은 붉게 피어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비에 젖은 상사화는 더욱더 싱그러움을 더한다.

 

 

길 가에 봉숭아 반갑기만 하다.

 

 

 여름이면 이 냇가에서 물장구치며 놀았었는데 하천의 구조가 달라졌다. 물이 그리 깊지도 않거니와 강변에 가득했던 자갈들도 보이지 않는다.

하루 온종일 물놀이를 하다 지쳐 입술이 파래지면 냇가에 앉아 달구어진 자갈돌을 귀에 대고 팔짝팔짝 뛰면 귓속에서 따뜻한 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선 옷으로 대충 물기를 닦으며 '해야 해야 나오너라. 김치국에 밥 말아 먹고 해야 해야 나오너라~'라고 한바탕 노래를 부르고 나면 몸이 따뜻해졌었다.

 

 

 느티나무 우거진 그늘나무 아래 커다란 돌덩이나 바위가 있었는데 흔적도 없다. 느티나무 맞은편에는 커다란 밤나무가 있었는데 학교에 갈 때면 시퍼렇고 토실토실한 벌레가 뚝뚝 떨어져 공포스럽게 했었는데 그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보이는 느티나무는 오래되고 속이 비어서 바람이 부는 날에는 삐그덕삐그덕 소리를 내어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아서 이곳을 통과할 때면 전력질주를 했었다.

 

 

 흙길이었던 이 길도 포장이 되었고 난간도 만들어 놓았다.

4학년 때 리어커에 동생과 동생친구를 태우고 장난한답시고 물에 빠드린다고 시늉을 했었는데 앞 바퀴가 난간에 걸쳐지면서 무게 중심을 잃어 그만 리어커와 함께 셋이서 물 속으로 풍덩 빠진 적도 있었다.

바위가 많았는데 멀쩡한 걸 보면 하늘이 도운 듯 하다.

물에 빠진 다음날부터 가슴이 뜨끔거리기 시작했다. 심하게 놀래서 그런거라며 어머니께서 청심환을 챙겨 주셔서 먹은 후에 그 증세가 사라진 듯하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다리는 튼튼하게 새로 만들어 놓았는데 예전엔 다리가 난간도 듬성듬성하고 낮은 난간인지라 어린아이들이 빠질 수 있었고 비만 오면 떠내려 가곤 했다.

저기 보이는 느티나무 옆에는 물레방아가 돌고 있었,고 한겨울에 막내동생이 아장아장 걷다가 그만 다리에서 떨어져 둥둥 떠내려 가는 걸 동네 아주머니께서 꺼네 주셔서 살았다. 그땐 물레방아 물이 쏟아져 내리는 도랑이 있었고 지금처럼 바로 냇물로 합류되지 않았다. 물도 깊어 다리 위에 올라가 다이빙을 했던 곳이다.

그리고 느티나무가 울창해 단오 즈음이면 굵은 새끼줄로 나뭇가지에 그네를 매어 놓으면 마을사람들이 신나게 그네를 탔고 친구들과  누가 더 높이 뛰나 내기하며 느티나무 잎사귀를 입으로 따기 내기도 했었다.

짓궂은 동네 오빠는 그네의 발판을 나무구멍에 숨겨두어 발을 동동 구르게 했었다.

그 잘 생긴 느티나무는 가지가 찢겨나가고 잘려나가 앙상한 모습으로 서 있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느티나무 주변에 쌓아놓은 벽돌도 어색하기 짝이없다. 나뭇가지를 너무 많이 잘라내어 그늘을 만들지 못하고 쉼터를 제공해 주지도 못한다고 친구 어머님께서는 많이 아쉬워 하신다. 나도 무척이나 안타깝다.

 

 

 기와집으로 기억되는 동네 큰 집에는 현대식 집이 들어와 있고 조경이 잘 되어 있다. 이 집 옆으로 내가 살 던 집이 있었는데 흔적조차 없고 나무가 가득 심겨 있다.

금방이라도 안집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이름을 불러주실 것만 같다.

집 뒤 밤나무도 보이지 않고 안집 뒤뜰에 있던 하얀 색 앵두가 달리던 앵두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화장실 앞 고약한 냄새 때문에 비위가 상하셨던 어머니께서는 화장실 앞에 예쁜 꽃들을 심어 놓으셨다. 작약, 붓꽃, 채송화, 봉숭아 등이 있었던 것 같다. 작약은 학교에 가져가 화병에 꽂아두기에 좋았다.
앞마당에는 나팔꽃이 철사를 천장으로 늘여놓은 것을 타고 올라가 예쁜 자태를 뽐냈었다.

 

 

 이 길 따라 학교에 가곤 했는데 작은 옹달샘도 이젠 보이지 않는다.

 

 

 

 

 

 

이 길을 따라 오리쯤 가면 월문리가 나온다. 친구따라 산너머로 월문리에 간 적이 있었다.

 

 

비 온 뒤라 안개가 피어난다.

 

 

 비만 오면 다리가 떠내려 가 저 건너 사는 친구들은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어린 마음에 그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대문을 없애도 평화롭게 사는 모습

도시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나무 밑을 지날 때면 나무가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아 정신없이 뛰곤했다.

 

 

 35년이 넘었건만 끄떡없이 건장한 나무를 보니 반갑다.

 

 

 

 

건너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냇가를 따라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고 해질녘에는 다슬기를 잡으러 참 많이도 다녔었다. 저 아래 책상바위 근처엔 물이 깊어 수영할 엄두도 내지 못했고 작은 바위에 붙은 다슬기를 손으로 훑으면 한 움큼씩 다슬기가 나왔었다.

그리고 저기 보이는 느티나무 아래로 한 2km 정도 되는 마을에 인삼농사를 지으러 가신 어머니께서는 밤늦은 시각이 되어야 돌아오시었다.

엄마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며 자주 쳐다보던 느티나무다.

 

지나고 나니 모두 다 소중한 추억이다.
바로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