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사 산행을 하기 전 생각보다 빨리 도착하여 들른 추사선생 유적지를 한가하게 둘러보고 추사고택, 화순옹주 홍문,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무덤, 추사기념관, 추사 김정희선생의 무덤 등을 차례로 둘러본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고택은 전통가옥으로 한옥을 공부하기에도 좋고 정원이 잘 가꾸어져 언제 들러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서 좋다.
화순옹주홍문 (和順翁主紅門) , 충청남도 유형문화제 제 45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이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할머니이자 조선 영조(재위1724∼1776)의 둘째딸인 화순옹주는 남편인 김한신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아버지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이겨내지 못한 옹주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남편에 대한 옹주의 정절을 칭찬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 지금의 열녀문은 훗날 정조(재위 1776∼1800)가 내린 것이다.
김정희유적지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문 외에 옹주와 김한신의 합장묘·김정희 묘·김정희 고택이 있고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된 백송이 있다.
묘막터는 원래 53칸의 큰 건물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불에 타서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있다. 앞면 8칸·옆면 1칸 규모이며 근래에 담장을 설치하였다.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무덤
조선 후기의 문신인 정효공 김한신(1720∼1758)의 묘소이다.
1732년 13세 때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졌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과 제용감제조를 역임하였다. 글씨를 잘 쓰고, 시문에 능하였던 그는 애책문(哀冊文), 시책문(諡冊文) 등을 많이 썼으며, 도장을 새김에 있어서도 뛰어나 인보(印寶:임금의 도장)를 새기기도 하였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曾祖父)인 김한신(金漢藎)은 1720(숙종 46년) 영의정(領議政) 김흥경(金興慶) 아들로 태어나 13세때에 영조(英祖)의 장녀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尉)로 봉해졌다. 추사선생 일문(一門)을 흔히 월성김문(月城金門)으로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벼슬은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 제용감제조(濟用監提調)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으며 시문에 능하였다. 시호는 정효공(貞孝公)이다. 김한신(金漢藎)이 38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和順翁主)는 애도(哀悼)의 정(情)이 극에 달하여 곧 부군을 따라 세상을 떠나셨다. 옹주는 부마의 묘에 합장(合葬)되었다.
흔히들 남편을 잃으면 수명이 1년 감소되고 자식을 잃으면 3년의 수명이 감축한다고 한다.
그만큼 스트레스도 크고 슬픔이 극에 달해 사람을 수명마저도 감소할만큼 견디기 힘든 고통일 것이다.
화순옹주는 남편 월성위 김한신이 사망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아버지 영조 임금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소중한 목숨을 스스로 저버리고 저세상으로 떠난 화순옹주의 사랑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남편을 따라 세상을 등지고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을 이루기는 하였겠지만 사랑하는 부모님의 가슴에 한을 남긴 불효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월성위 김한신의 묘
상세문의: 충청남도 예산군 문화관광과 041-339-7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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