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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여행] 고향 찾던 길가에 말없이 길동무 해 주던 말무덤

무지개_느티 2011. 10. 31. 06:30

청주에서 옥산을 지나면서 금계리, 호죽리를 가다보면 만나는 고개가 몽단이고개이다.

이 몽단이재를 넘어 고속도로 밑을 통과하면 바로 앞에 나타나는 무덤이 있으니 사람들은 말무덤이라 한다.

 

이곳 몽단이재를 넘어 말무덤을 지나 금계리로 가면 아버지께서 근무하시던 금계국민학교(금계초등학교)를 만나게 된다.

청주에서 오빠, 나, 여동생 셋은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며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는 남동생 둘을 데리고 전기도 안 들어오던 두메산골 금계리로 전근을 오신 아버지를 따라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이사를 오셨었다.

사택이 여러채 있었는데 구들장이 잘못 놓였는지 나무를 때면 연기가 방 안에 가득했었다.
금계리에서 6년 반이난 근무하시던 아버지께선 옥산국민학교를 거쳐 강외면에 있는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으셨다.

 

그때부터 청주에서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오빠, 동생들 세 명은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1984년 대학교 1학년

난 또다시 서울로 유학을 떠나야만 했다.

 

몽단이고개 하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함께 한 곳이고 교통이 좋지 않아 학창시절에 금계리까지 걸어가려 하면 무척이나 적막하고 무서웠던 곳이다.

옥산에 도착해 시골에 한 대밖에 없는 전화를 갖추고 사는 가계에 전화해서 아버지께 연통을 하면 옥산까지 아버지께서 오토바이를 타고 마중나오시곤 하셨다.

 

추억의 몽단이고개이다.

명절 때 금계리에서 호죽리를 넘어갈 땐 고운 백사장을 지나 장화를 신고 냇가를 건너 호죽리에 가곤 했었다.
호죽리는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고향
한천동 동래정씨 선산엔 나의 13대 조상님들까지 모셔져 있다.

고운 모래가 있는 강변과 맑은 물을 자랑하고 물고기가 흔했던 금계리

지금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 곳이다.

 

숱하게 지나다니던 몽단이고개

그곳을 지나 만나던 말무덤의 유래를 알 수 없었는데 이번에 호죽리 고향에 다녀오다 길가에 있는 유래비가 있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유래비에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몽단이재(접지골)와 의마총 유래비'

  이곳 유래의 주인공인 박동명(朴東命)은 순천인이며, 호는 매은당, 시호는 충경이다.

 

  공은 1575년(선조8) 비하동 주봉마을에서 출생하고, 1599년(선조32)에 무과급제 태안군수 제주목사를 봉직했으며, 공은 한 몸으로 1592년 임진왜란(선조25년, 당시 18세), 1624년(인조12년) 이괄의 난, 1636년(인조14년) 병자호란에 출전하여 62세의 고령으로 순국한 구국의 초석이었다. 비하동 주봉마을에 왕이 하사한 충신 정려문이 세워젔고 공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636년(병자)년 인조 14년에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침공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할 무렵 매은당 박동명은 의병을 모아 이춘록과 조성남을 전후군으로 하여 12월 24일 군사를 움직여 27일에 남한산성 근처 광주 무계에 당도하여 적과 정면 대결 맹렬히 싸우다가 급기야 적의 화살에 맞아 순절하였다.

 

  그러나 매운당 휘하 김득성이 장군을 시신을 찾으려고 정성을 기울였으나 밤은 어둡고 날은 추워 찾을 길이 없어서 해매던 중 애마가 매은당 저고리를 입으로 뜯은 것을 말안장에 올려놓고 김득성이 도술을 이용하여 화살을 허공에 저어 박장군의 혼을 불러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줄곧 확인을 할 때마다 장군 영혼이 응답해 왔는데 몽단이(옛날 장남령) 고개에 이르러 응답소리가 끊어져 고개턱에서 화살을 꽂아놓고 통곡하며 진혼제를 올렸다.

 

  이 무렵 큰아들 홍원이 꿈을 꾸었는데, 의관을 전제한 아버지 매은당이 백발을 쓰다듬으며 방으로 들어와 아랫목에 앉으며, "내가 고개를 넘지못하고 구천으로 올라갔으니 내 옷을 거두어 무덤을 치도록하라"는 현몽을 하여 잠에서 깨어 아버지가 순절한 것을 알고 몽당이 고개를 향하여 가보니 김득성이 화살을 꽂아놓고 진혼제를 올리고 있었으며 장군의 애마는 말발굽이 땅에 붙어 7일간이나 물 한 모급 먹지 않고 슬피 울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는데 이곳에 꿈에서 깨어났다하여 몽단(夢斷)이라 전하여 내려왔다.

 

  매은당 박동명의 묘는 의관장(시신이 없이 의복만 묻은 것)을 하고, 애마는 주인을 추모하는 의로움을 더 한층 가상히 여기고 장군의 묘소로부터 150m 하단에 후하게 장사지내어 영혼을 위로하였으며, 이 곳을 말무덤(의마총)이라고 한다. 공이 전사한지 368년이 지난 오늘 몽단이재 또는 접지골에 대한 유래비를 세우다.

 

 

저 다리 밑을 통과해 오른쪽으로 가면 금계리가 나온다. 한겨울 엄마, 아빠를 따라 눈이 허벅지까지 쌓였던 중학생 시절의 어느 날

저 길을 푹푹 빠지며 4km를 걸어간 적이 있다. 집에 도착하니 방은 냉방이고 아버지께선 이불을 깔아주시고 백열전구를 켜서 다리를 녹여주셨었다.

어머니께선 방에 들어오시지도 않고 바로 아궁이에 불을 지피셨다.

세월은 덧없이 흘려 3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은 어찌 이리도 생생한 것인지......

 

 

말무덤

 

 

눈이 부시게 파란 하늘 아래 말무덤은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