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8일
친정부모님을 뫼시고 화암사를 찾았다.
때마침 비가 내려 계곡엔 시원한 물이 흘러 여름의 더위를 식혀 주었다.
보물 제 663호 극락전의 모습
보물 제 662호인 꽃비가 내린다는 뜻의 우화루
우화루의 목어
절 뒤에 상사화가 한창이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로 철계단이 나 있어 그 철계단을 따라 147개의 철계단을 걸어서 화암사에 이른다.
시원한 계곡물이 장관이다.
엄마는 다리가 불편하셔서 계곡 입구에서 쉬고 계셨다. 경내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데 그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못내 아쉬었다.
승용차로 화암사 경내로 올라가는 길이 있었는데 나중에서야 알았다.
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시인 안도현이 화암사를 두고 읊은 시 「화암사가 있는 풍경」 의 일부분이다. 화암사중창비에 보면 “바위벼랑의 허리에 너비 한 자 정도의 가느다란 길이 있어 그 벼랑을 타고 들어가면 이 절에 이른다. 골짜기는 가히 만 마리 말을 갈무리할 만큼 넓고 바위가 기묘하고 나무는 늙어 깊고도 깊은 성(深廓)이다. 참으로 하늘이 만든 것이요 땅이 감추어둔 도인의 복된 땅이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이렇듯 화암사는 입지가 험난하여 사람들의 접근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고 은둔자마냥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그러던 화암사가 은둔자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사람들의 발길을 허용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였다. 화암사 극락전이, 오늘날 고건축분야에서 해방 이후 최대의 발견이라는 '하앙구조'를 지닌 건물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하앙(下昻)’이란 일종의 겹서까래로, 처마길이를 길게 뺄 수 있도록 고안한 건축 부재인데 그동안 중국과 일본에서만 발견되고 우리나라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단지 고려시대의 청동탑 모형 등에서만 확인되었을 따름이었다. 이를 빌미로 일본학자들은 한국을 거치지 않고 중국에서 일본으로 하앙법이 직수입되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렇듯 1970년대 화암사 극락전에서 발견된 하앙식 구조는, 일본에는 충격이었고 한국에는 더없이 반가운 발견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깊은 산속에 갈무리되었던 보물의 발견은 우리의 자긍심을 깊이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꽃비가 내린다는 이름을 가진 우화루의 풍모와 고즈넉한 가람의 짜임새는 화암사가 고건축의 보고(寶庫)임을 새삼 드러내주고 있다.
*화암사 창건 연대
화암사의 정확한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초의 기록인 「화암사중창비문」에 따르면 신라시대인 7세기 경 원효(元曉)ㆍ의상(義湘) 두 스님이 이곳에 절을 짓고 수행했다고 한다. 중창비에 전하는 창건내력은 다음과 같다.
옛날 신라의 원효와 의상 두 조사께서 중국에 유학을 갔다가 도를 얻고 귀국하여 이곳에 주석하였다. (두 분은) 사찰을 짓고 머물렀는데, 절 법당의 주불인 수월자용(水月姿容) 보살은 의상스님이 도솔산에 수행하러 갔다가 친견했던 지용과 등신(等身)으로 조성한 원불(願佛)이었다. 절의 동쪽 고개에는 원효대(元曉臺)라는 법당이 있고 절의 남쪽 고개에는 의상암(義湘庵)이라는 암자가 있으니, 모두 두 분 조사께서 수행하시던 곳이다….
비문의 내용처럼 화암사는 당시 원효ㆍ의상 스님의 수행처로 알려져 있고, 사찰 동쪽과 남쪽 고개에 원효대와 의상암이라는 암자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후의 연혁 역시 찾기 힘드나 고려시대에 문인 백문절(白文節, ?-1282)이 이곳에 들린 후 남긴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여, 고려 말에도 화암사에 법등이 이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초기인 1425(세종 7)에 와서 성달생(成達生, 1376-1444)이 절터만 남아 있던 이곳을 자신의 원찰로 삼기 위해 중창하였으며, 이때 해총(海聰) 스님 등이 불사를 주관하였다. 화암사중창비문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1441년(세종 23)에 성달생이 써놓은 글로서, 그 후 130여 년이 지난 1572년(선조 5)에 비가 건립된 것이다.
1440년(세종 22)에 극락전을 건립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일부 건물이 소실되어 1606년(선조 39)에 극락전을 중건하였다. 1611년(광해군 3)에는 성징(性澄) 스님이 3번째 중창을 하였고, 1629년(인조 7)의 4창(創) 후 1666년(현종 7) 영혜(靈惠) 스님에 의한 5창이 있었으며, 1711년(숙종 37)에 다시 6창한 후 극락전상량문을 지었다. 1830년(순조 30)에 명부전 지장시왕탱, 1835년(헌종 1)에 산신각 산신탱을 조성하였으며, 1858년(철종 9)에 의상암의 신중탱을 조성하였는데 의상암이 없어지면서 극락전 내부로 옮겨 봉안하고 아울러 명부전의 각 시왕탱을 조성하였다. 1871년(고종 8)에 극락전 현왕탱, 1917년에 극락전의 칠성탱 및 괘불을 조성하는 등 19세기에서 20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사찰의 불화를 새롭게 단장하였다.
근래에 와서는 1981년ㆍ2002년에 각각 노후한 극락전을 해체 보수하였고, 1982년에 산신각의 산신탱을 조성하여 현재의 가람으로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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