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고도, 웅진시대의 왕궁터 공산성
유유히 흐르는 금강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공산성, 공주시의 상징이자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공산성 아래에는 오래된 금강철교가 금강을 가로질러 공주를 찾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공산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백제시대, 즉 백제가 한성(위례성)에서 웅진으로 옮겨오면서 공산성의 역사는 시작된다.
백제 475년
백제 21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한산성에서 피살되자 그의 아들인 문주왕이 즉위하여 서울을 현재의 공주인 웅진(熊津)으로 옮기게 된다.
백제는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538년)에 부여로 옮길 때까지 5대 64년간 왕도를 지킨 산성으로, 공산성은 백제시대에 웅진성으로 불리워졌으며 공주를 지키기 위한 대표적인 고대 성곽이다.
공산성의 규모를 보면 산성은 북으로 금감이 흐르는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연의 요새로서,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포곡형이며 원래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선조, 인조 때에 대부분 현재와 같은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성곽의 총 길이는 2,660m로 외성을 제외하면 2,193m가 된다. 성벽의 높이는 약 2.5m, 너비 약3m로 대부분 보수되었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 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는데 1993년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하였다.
암문, 치성, 고대, 장대, 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있으며 쌍수정, 영은사, 연지, 만하루 등이 있으며,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 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다정한 한 가족의 정겨운 모습을 담아본다.
공산성을 멀리 바다다 보며 어릴 적 추억을 떠올려 본다.
공산선은 어릴 적에 외가에 오면 늘상 들르던 곳이다.
공산성 가까이 시외버스정류장이 있었는데 그곳 가까이에 전파상을 하시던 외삼촌이 사셨고 , 공주고등학교 근처에 외가에 있어서 방학 때면 오빠와 함께 외가를 방문하곤 했었다. 외가에 가면 이종사촌 동생들과 우리 5남매가 외가를 가득 채우곤 했었다.
외할머니를 따라 시장에 가면 여름철에 참외며 피자두 등을 사주셨다. 어릴 적 외할머니 따라 시장 구경을 가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검찰청에 다니시던 셋째이모께서 퇴근을 하시면 맛있는 야쿠르트와 과자를 사 주셨던 기억이 난다. 외삼촌 댁에는 낮에 오빠와 함께 동생들과 이종사촌 동생들이 함께 어울려 장사를 하시던 외삼촌댁에 가서 외삼촌을 정신없이 하곤 했었다.
여러 애들이 번거차례로 아이스크림을 사 달라고 하니 외삼촌께서 혼동을 하셨는지 내가 아이스크림을 사 달라고 어렵사리 말씀을 드렸더니
"좀 전에 먹었잖아." 하셨다.
그 시절 부라보콘이 100원, 비비빅이나 누가바 등이 50원 했으니 꽤 오래 전 일이다.
그때 외삼촌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어찌나 민망하고 얼굴이 빨개졌었는지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외삼촌께선 조카들이 너무도 많이 와서 보채니 헷갈리기도 하셨을 것이다.
난 어릴 적에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하지 말라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고 어른들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기를 즐겨했었다. 그때 외가에 가서 이모 친구분들이 공주사투리를 쓰면서 하시던 말씀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너무도 재미나게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래서 지금도 남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나 보다.
주차장에서 공산성의 금서루로 올라가는 길로 길 우측에는 공주와 관련된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공산성 금서루
공산성 4개의 성문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 문루이다.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가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 등의 문헌 기록과 동문 조사 자료 및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현재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복원하였다.
한적한 성곽길을 걷는다. 경사가 있어 속도를 내니 등에 땀이 난다. 그런데 난 이런길 걷기가 재미가 없다.
무릎이 안 좋아 발을 디딜 때마다 통증이 느껴진다. 자연스럽게 흙길을 만들어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공산성 성곽에서 바라보는 공주 시내, 저 멀리 보이는 산이 무령왕릉이 묻혀있는 송산리고분군이다.
인조가 이괄이 일으킨 반란(1624)을 피하여 공주로 잠시 피난 왔을 때, 이곳에 머물렀던 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쌍수정이다.
쌍수정사적비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여 세운비로 비문에는 이괄의 반란,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 동안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 등이 적혀 있다. 1708년에 세웠으며 인조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속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공주)로 수도를 옮긴 475년 이후에 세워진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1985~1986년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10칸~20칸 등의 큰 건물터와 연못 및 저정시설 등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었으며 백제의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하여 많은 유적이 발굴되었다.
일부 건물터에서는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파서 기둥을 세운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산성 연못
백제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에 있던 연못으로 연못 안에서는 연꽃무늬 만자, 무늬 막새기와, 벼루, 등잔, 삼족토기 등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들이 발굴조사에서 나왔다. 연못은 대접 모양으로 자연석을 정연하게 쌓아 만들었는데 윗부분 지름이 7.3m, 바닥지름이 4.78m, 깊이는 3m에 이른다.
비비 꼬여서 자란 나무의 모양이 특이하다.
진남루로 가는 길
진남루
공산성의 남문으로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조선 초기에 석성으로 다시 쌓으면서 세운 문루이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고쳐지었는데 지금있는 건물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여 원래대로 복원한 것이다.
돌만 보면 쌓아 올리는 사람들의 손길을 느끼며 한 컷 담아본다.
진남루의 뒷모습
진남루에서 영은사로 넘어가는 고갯길
저 멀리 영은사가 내려다 보인다.
영은사
조선 세조4년에 세워진 사찰로 묘은사로 불렀다가 이괄의 난 때에 이절에 피신한 인조가 은적사로 하였다가 다시 영은사로 고쳤다.
광해군 8년에는 이곳에 승장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할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고 여기서 훈련된 승병은 영규대사의 인솔 아래 금산전투에 참여하였다. 영은사 부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불상 6구가 출토되어 조선시대 이전에도 이곳에 사찰이 존재했었음을 짐작케 하는데 백제시대부터 사찰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암문
공산성 연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방형의 연못이다.
금강에 가까이 위치하여 물을 쉽게 확보할 수 있게 하였고, 연못의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돌로 층을 이루게 단을 쌓았으며, 연못 수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북쪽과 남쪽에 계단 시설을 하였다.
특히 성의 안과 밖을 몰래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든 암문이 연못까지 연결되고 있어 산성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만하루
조성 영조대에 건립된 누각으로 연못과 금강 사이에 자리 잡아 공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과 평소 경치를 관람하는 역할을 하였다.
홍수로 붕괴되어 땅 속에 묻혔다가 1982년 발굴조사로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1984년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복원하였다.
금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설치된 공북루와 성곽이 한 폭의 그림같다.
공북루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길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관찰사 유근이 쌍수산성을 고쳐 세우면서,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를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부르고, 그 옆에 월파당을 지었다고 한다. 현종 4년(1663) 관찰사 오정위가 낡은 것을 다시 지었으며 기록은 송시열이 하였다. 월파당은 효종 5년(1654)에 붕괴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공북루는 송시열이 쓴 기록을 비롯해 여러 글이 걸려 있어 멋스러운 경치를 더해 주는 건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루이다.
백제문화체험관
장승의 해학적인 표정이 돋보인다.
옥사체험
금서루 아래에서 공산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어린 학생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봄날 아름답게 피어날 꽃들을 상상해 본다.
공산성에 불이 켜지고 은은한 불빛에 공산성의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
'삶의 여유을 찾아 > 충청도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주여행] 공주박물관에서 만나는 무령왕릉의 유물들 (0) | 2012.03.26 |
---|---|
[공주여행] 정겨운 한옥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추억 속에 잠겨 보자- 공주한옥마을 (0) | 2012.03.04 |
[공주여행] 백제의 역사를 세상에 알리다- 무령왕릉 (0) | 2012.03.01 |
[공주여행] 한국 구석기의 시작을 알리는 모태가 된 공주 석장리유적 (0) | 2012.02.29 |
[홍성여행] 용봉산 산행을 하다 잠시 들른 용봉사 (0) | 2011.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