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여행] 공주박물관에서 만나는 무령왕릉의 유물들
그 지역의 역사를 알려면 그 지역의 박물관을 찾아가는 것이 좋다.
박물관에는 모든 자료가 잘 구비되어 있고 설명 또한 잘 되어 있으니 금상첨화다.
공주국립박물관은 지역의 웅진 백제문화를 보존하고자 하는 주민들의 뜻이 모아져 '공주고적보존회'를 모태로 출발한다.
1940년 공주시 중동에 '공주박물관'을 개관하였고, 1945년 국립박물관이 되어 2004년 웅진동으로 신축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2년 공주시 송산리고분군에서 발굴 조사된 무령왕릉과 대전.충남지역에서 출토된 국보 19점, 보물 4점을 포함한 30,000여 점의 문화재를 수집.보관하고 있으며 학술적 가치고 높은 중요유물은 상성전시와 특별전시를 통해 관람객이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립공주박물관
백제 무령왕
무령왕은 백제 25대 왕이며 성은 부여, 이름은 사마(斯麻) 혹은 융(隆), 시호(諡號)는 무령(武寧)이다. 동성왕에 이어 501년 40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523년 62세까지 22년간 재위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22담로제를 실시하고 민생안정과 백제의 국력을 신장하여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는 등, 대.외적으로 큰 업적을 이룩아였으며, 그의 아들 성왕이 백제중흥을 열게 하는 기틀을 다졌다.
무령왕릉 발굴과정을 담은 사진들
무령왕릉 지석(武寧王陵 誌石) 국보 제 163호
지석은 무덤에 묻힌 사람의 이름과 생애를 기록하여 넣은 돌판을 말한다. 이 지석은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으로 2매이다. 지석은 왕의 묘지, 간지도(干支圖), 매지권(買地券), 왕비의 묘지로 구성되어 있다. 왕의 지석은 전면에 5~6cm의 선을 만들고 6행에 걸쳐 기록하였으며, 후면에는 간지도를 새겼다. 왕비의 지석은 전면에 2.5cm~2.8cm폭으로 선을 긋고 4행에 걸쳐 기록하엿으며, 후면에는 매지권을 새겼다.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때 만들어진 석수이다.
석수(石獸)란 돌로 만든 동물의 상(像)으로 좁게는 궁전이나 무덤 앞에 세워두거나 무덤 안에 놓아두는 돌로 된 동물상을 말한다.
무령왕릉 석수는 높이 30.8㎝, 길이 49㎝, 너비 22㎝로 통로 중앙에서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입은 뭉뚝하며 입술에 붉게 칠한 흔적이 있고, 콧구멍 없는 큰 코에 눈과 귀가 있다. 머리 위에는 나뭇가지 형태의 철제 뿔이 붙어있다. 몸통 좌우, 앞·뒤 다리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날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꼬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배설 구멍이 달려 있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무덤 수호의 관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
국보 154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왕관(王冠) 꾸미개(장식) 한쌍이다.
높이는 각각 30.7㎝, 29.2㎝이고, 너비는 각각 14㎝, 13.6㎝이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을 뚫어서 덩굴 무늬를 장식했으며, 밑으로는 줄기가 있는데 아래위로 2, 3개의 작은 구멍이 있어 무엇인가에 부착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좌우로 벌어진 줄기 중간에는 꽃 무늬를 배치하였으며, 줄기가 길게 연장되면서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준다. 두 가닥은 아래로 향하게 하여 변화를 주고있다. 앞면에는 전체에 걸쳐 구슬모양 꾸미개를 금실로 꼬아서 달았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벽돌을 이용해서 만든 벽돌무덤(전축분)이다. 출토된 유물들은 백제 문화의 수준과 풍속의 일면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중 지석(誌石)은 삼국시대 고분 가운데 최초로 무덤에 묻힌 주인과 만든 시기를 확실히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있다.
국보 156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금 귀고리 한 쌍으로 길이는 8.3㎝이다. 왕의 널(관)안 머리 부근에서 발견되었으며, 호화로운 장식이 달려있다.굵은 고리를 중심으로 2가닥의 장식을 길게 늘어뜨렸다. 하나는 속이 빈 원통형의 중간 장식 끝에 금판으로 된 커다란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이 장식은 무늬가 없어 간소하지만 앞·뒷면에 타원형의 작은 잎을 하나씩 붙여 변화를 주었다. 옆으로 보면 안이 굽은 모습을 하고 있다. 원통형의 중간 장식에는 금선과 금구슬을 이용해 장식한 마개가 있고, 서로 마주보게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둘렀다. 다른 한 가닥은 여러 개의 작은 고리로 이루어진 구슬 모양의 장식에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연결하고, 끝에는 금모자를 씌운 푸른 곱은 옥을 매달아 금색과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이런 2줄의 귀고리는 경주 금령총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다.
주된 수식은 금세공(金細工)으로 꾸민 원통형(圓筒形) 중간 장식을 연결하고 아래쪽 끝에 심엽형(心葉形)을 달아 놓았다. 이 심엽형은 장식이 없어 간소하지만 앞뒷면에 타원형의 작은 자엽(子葉)을 첨가하여 변화감을 주고 있다.
또 하나의 수식은 누금세공의 공옥(空玉)에 영락(瓔珞)을 달아 장식한 5개의 구슬을 연결하고 끝에는 금모(金帽)를 씌운 경옥제(硬玉製) 곡옥(曲玉)을 달았다.
국보159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뒤꽂이 일종의 머리 장신구이다. 무령왕릉 나무널(목관) 안 왕의 머리에서 발견되었으며, 길이는 18.4㎝, 상단의 폭은 6.8㎝이다.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역삼각형 모양이며, 밑은 세가닥의 핀 모양을 이루고 있어 머리에 꽂았던 것으로 보인다. 역삼각형의 윗부분은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고, 3개의 꼬챙이쪽은 긴 꼬리처럼 되어 전체 모습이 날고 있는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양 날개쪽 좌우에는 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찍었고, 그 아래는 서로 대칭으로 덩굴무늬를 빈틈없이 메꿔 놓았다. 새의 머리와 날개 부분의 테두리는 끌 끝으로 찍은 작은 점들이 열지어 있다. 여기서 사용된 문양은 모두 뒤에서 두들겨 솟아 나오게 한 타출법(打出法)을 사용하였고 ,세부 표현에는 선으로 새기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왕의 머리부분에서 발견되었고, 끝이 3개로 갈라진 점으로 보아 의례 때 쓰인 머리 장식품으로 보인다.
머리에 꽂히는 부분은 3갈래로 갈라져서 삼차형(三叉形)을 이루고 있다. 날개에 해당하는 부분 좌우에는 주문(珠文)을 하나씩 배치하고 아랫도리는 일종의 섬세한 당초문(唐草文)으로 빈틈없이 메워 놓았다.
이 문양(文樣)들은 모두 한쪽에서 두드려 낸 타출법(打出法)을 쓰고 세부에 대한 표현에는 선각(線刻)을 아울러 쓰고 있다.
국보164호 무령왕비 베개
왕의 머리 받침은 거의 부식되어 두 토막만이 남아 있을 뿐이어서 형체를 알 수 없다.
통나무를 사다리꼴로 만든 다음 그 긴 변의 중앙에 머리가 놓일 수 있도록 반원형으로 파냈다. 전체에 붉은 주(朱)를 칠하고 그 위에 금박(金箔)을 오려 붙여서 귀갑문(龜甲文)을 만들었다. 각 구획 안에 연화문(蓮華文)을 비롯하여 봉황(鳳凰)·비천(飛天)·물고기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문양(文樣)을 그려 놓았다.
머리가 놓이게 되어 있는 곳에는 직물(織物) 같은 것이 붙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국보165호 무령왕 발받침
무령왕릉 목관 안에서 발견된 장의용 나무 발 받침으로 왕의 발 받침대이다.
윗부분이 넓고 아랫부분이 좁은 사다리꼴 통나무의 중앙을 W자로 깊게 파서 양 발을 올려놓게 만들었다. 전면에 검은색 옻칠을 하고 폭 0.7㎝정도의 금판을 오려 거북등 무늬를 만들었으나 일부는 떨어져 없어졌다. 6잎의 금꽃을 거북등 무늬 모서리와 중앙에 장식하고, 꽃판 가운데에 옛날 부인의 머리장식의 하나인 보요(步搖)를 매달아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국보 160호
공주시 무령왕릉 왕비의 나무널(목관)내 왼쪽 팔 부근에서 발견된 한 쌍의 은제 팔찌로, 바깥지름 8㎝, 고리지름 1.1㎝이다.
팔목이 닿는 안쪽에는 톱니 모양을 촘촘히 새겼고, 둥근 바깥면에는 발이 셋 달린 2마리의 용을 새겼다. 용의 조각은 세밀하지는 않으나 힘이 있어, 묵직한 팔찌와 잘 어울리고 있다.
한 개의 팔찌 안쪽에 새긴 글로 보아 왕비가 죽기 6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만든 사람의 이름과 무게가 쓰여있다.
전체적인 윤곽이 깔끔하고 중후하며, 만든시기와 작가, 작품과 직접 관계된 글이 있는 예로, 고대 미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탄목 목걸이(왕)
금동신발
보물 148호 공주 중동 석조
국립공주박물관 정원에 있는 백제시대 석조로, 사찰에서 연꽃을 담아 장식했던 것이다.
원래는 공주시 반죽동의 대통사 터에 공주 반죽동 석조(보물 제149호)와 함께 있었으나, 일제시대에 일본군이 말구유로 쓰기 위해 옮겨가 제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1940년 이 곳으로 옮겨올 당시 중동초등학교에서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중동석조’라 부르게 되었다.
규모에 있어서 반죽동 석조보다 약간 작을 뿐 양식이나 조각 수법이 동일하여, 어느 한 건물 앞에 한 쌍으로 두기 위하여 동시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믿어진다.
석조를 받치고 있는 받침 기둥은 일본군에 의해 깨어져 없어지고, 이후 반죽동 석조의 것을 모방하여 만들었는데, 원기둥에 연꽃을 둘러 새긴 모습이다. 석조는 굽이 높은 사발 모양으로 입구 가장자리에 굵은 돌기를 돌렸다. 바깥 면에는 2줄의 작은 띠를 돌려 새기고, 띠 위에 일정하게 연꽃을 장식하였는데 반죽동 석조에 비하여 많이 닳지 않아 문양이 훨씬 뚜렷하다.
대통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성왕 7년(529)에 창건된 사찰이므로, 이 석조는 그 제작년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백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석조의 형태나 연꽃무늬는 백제의 불교미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므로 그 가치는 반죽동석조와 아울러 높이 평가되고 있다.
보물 149호 공주 반죽동 석조
공주 중동 석조와는 규모만 다를 뿐 양식이나 조각수법이 거의 같아서, 두 석조는 어느 한 건물 앞에 한 쌍으로 두려고 동시에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조는 굽이 높은 사발을 확대한 모양으로 네모난 바닥돌 이외에는 거의 동그란 구조이다. 바닥돌 위에 원기둥으로 된 받침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 둥글고 큰 석조를 얹었는데, 석조는 화강암의 안을 파내어 만든 것이다.
받침 기둥에는 전형적인 백제 수법으로 12개의 잎을 가진 연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겨 두었는데, 이 무늬는 공주지방에서 나온 기와무늬와도 같은 모양이다. 그 위로 놓여있는 석조는 입구 가장자리에 굽처럼 넓적한 띠를 돌리고, 중앙에는 2줄의 띠를 돌렸으며 띠에는 8개의 연꽃잎을 가진 꽃송이를 사방에 도드라지게 새겨 장식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직사각형 석조와는 달리 연꽃잎을 장식한 받침기둥 위에 놓인 이 석조는 바깥 면에도 풍만한 연잎과 단아한 띠를 돌려 귀족적인 느낌을 준다. 현재 비바람에 의하여 장식무늬가 많이 닳아 있다.
석조대좌(石造臺座) 위에 원주형(圓柱形)으로 된 받침기둥을 세웠고, 그 위에 놓여진 둥글고 큰 이 석조는 한 개의 화강암(花崗岩) 내부를 파내어 만든 것이다. 받침기둥에는 전형적인 백제 수법으로 12개의 잎을 가진 연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구연부에는 모두 한 줄의 띠를, 가운데 두 줄의 띠를 돌렸으며 8개의 연꽃잎을 가진 연꽃무늬를 사방에 4개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이 연꽃무늬는 공주지방에서 나온 기와무늬와도 같은 모양이다.
반죽동 석조는 너비 155cm, 길이 56cm, 두께 16.5cm의 크기이다. 대통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기록에 의하면 백제(百濟) 성왕(聖王) 7년(529)에 창건됐으므로 이 석조는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백제 유물이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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