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스리는 글/좋은 글

하얀 배꽃을 보면 떠오르는 외할머니

무지개_느티 2016. 1. 9. 11:28

어릴 적

방학 때가 되면 우리 5남매는 공주 외가에 자주 가서 놀곤 하였다.

전파상을 하시던 외삼촌을 졸라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이종사촌 동생들과 함께 공주산성에도 오르고

외할머니 손 잡고 오빠랑 시장구경도 가고

굵은 자두며 맛난 참외도 사주셨다.

어릴 적 자두를 잘 못 먹던 나는 자두를 사주시면 늘상 오빠에게 건네곤 하였다. 

 

외할머니께서는 솜씨가 좋으셨다.

재봉틀로 내 반바지도 만들어 주셨고 빨래는 삶고 다리고 하셔서 늘상 하얗디하얗게 해놓으셨다.

이모들 속옷은 깨끗하게 삶고 다려입히신다고 하셨다.

힘이 세신 것은 아니었고 한들한들 코스모스처럼 가냘프셨다.

일을 하시고 나면 힘들어 기운이 없어보이셨고 박카스와 커피를 즐기셨다.

철이 들면서 이모들께서 타 주시던 커피는 환상의 조합이었다.

지금은 커피믹스를 골라서 입맛 맟춰 먹지만 그때는 알커피에 설탕과 프리마를 스푼으로 계량해서 입맛에 맞게 타 먹었다.

 

외할머니께서는 키도 크셨고 고운 한복이 잘 어울리는 전통미가 있는 아름다운 분이셨다.

심성이 고와 남들하고 다투거나 욕을 할 줄 모르시는 분이셨다.

음식 솜씨 또한 좋으셔서 외가에 가면 육개장에 김치를 곁들여 먹을 때 참 맛있었다.

김치를 손으로 쭉쭉 찢어서 밥숟가락에 올려놓고 먹을 땐 정말 맛이 있었다.

그 김치맛이 그리워진다.

 

좁은 T자형 마루를 지나 부엌 문을 열고 두 계단이나 내려가면 움푹 들어간 부엌이 나오는데 

큰 고무통에는 언제나 물이 가득 들어있었고, 가마솥 가득 연탄불로 따뜻한 물을 데워 놓으시면

그 물로 세수를 했었다.

조리 준비는 석유난로와 연탄불에 하셨던 것 같다.

마당에는 석류가 달리고 넓은 마당은 아니었지만 운치가 있었다.

 

길다란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면 외가가 나오는데

어렴풋이 우물물도 있었던 것 같다.

막내동생은 7살 때 형들 따라 나갔다가 길을 잃어 경찰서에서 연락이 와 데리러 간 적도 있었다.

그때는 집안에 잔치가 있어 모두 모였을 때 였던 것 같다.

외할아버지 회갑이셨나?

 

어린 시절 이모 지인들이 외가에 찾아와 안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시면

어린 나는 무슨 얘기인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

 

외가는 마음씨 고운 이모들이 4분에 외삼촌이 두분.

우리 엄마까지 7남매 다복한 가정이다.

천사같은 셋째이모는 91년에 5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셨고 큰외삼촌도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는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지가 어렴풋이 생각나는데 2,000년 2월이었던 것 같다.

직장의 바쁜 업무 때문에 바로 조문을 갈 수 없었던 것 같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한 달 뒤에 큰외삼촌께서 세상을 떠나셔서 엄마가 무척 마음 아파하셨다.

 

외할머니 제사가 음력 1월 11일이니 얼마 남지 않았다.

한번도 외할머니 제사에 가본 적이 없다.

마음 속으로 외할머니를 그리워하는 게 전부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추억은 언제나 그립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엊그제 막내이모께서 소포를 하나 보내오셨다.

뜯어보니 '한국문인 12월호'였다.

이모께서 제 94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셔서 문집에 이모의 시가 실려있었다.

이모의 시를 읽으니 외할머니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곱고 아름다우셨던 우리 외할머니

병상에 누우셨을 때도 "사람들이 니 할미보고 예쁘다."고 한다면서 함박웃음 지으시던

나의 외할머니.

"아리랑 한번 불러봐"하시면 이종사촌 동생 신랑(제부)이 흥겹게 불러드렸다고 한다.

인생길이 나를 찾아가는 아리랑길이란 걸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알아차리셨던 것일까?

꿈 속에서라도 한번 뵙고 싶다.

 

 

 

 

눈부시게 하얀 배꽃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넷째이모 회갑연에 가는 길가에 유구천가를 지나다 찍었던 배꽃이 있어 막내이모의 시와 함께 올린다.

 

배꽃님 나의 어머니

                                                                                    임 헌 경

 

달빛의 배꽃인 듯 단아한 나의 어머니

열하고 여덟살

금강에 배 띄우고

연지 곤지 새색시 되었네

 

구비구비 인생 고개

행복 꽃 나래 피는 사랑의 인생 고개

눈물바다 인생 고개

한숨바람 인생 고개

구십 평생 넘고 넘어

 

눈꽃처럼 새하얀 병실 침대에서

안개비 기억 펼쳐 보시듯

듣고 싶다 하시네 한오백년 노래를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

한 오백년 살자는데 웬 성화요

 

어머니 깊은 가슴

옹달샘 길어 올려

생애 처음으로

 

생애 마지막으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