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날
단양적성에 오른다.
계단이 있어 발걸음이 무겁다.
멀리서 단양적성을 당겨서 한 컷 찍어 본다. 그리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삼국이 나뉘어졌던 시절 이곳은 원래 고구려의 영토였다고 한다.
신라가 이곳을 점령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단양신라적성비를 세워놓았다고 한다.
단양신라적성비를 발견할 당시 신발에 묻은 흙을 털려고 돌부리를 찾다가 우연히 단양신라적성비를 발견했다고 하는데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며 감이 왔다고 한다.(발견하신 분의 성함을 잊어서 적을 수가 없다.)
땅 속에 묻혀 있어서 비교적 글씨도 잘 남아 있었다고 한다.
소중한 문화재가 땅 속에서 세상 구경을 못하고 영원히 묻힐뻔 했다.
참으로 다행이다.
멀리서 단양적성을 찍어 본다. 저곳에 올라가야 하는데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몹씨 지친다.
내가 꼴찌인 듯하다.
벌써 올라가 기다리고 계신 분들도 있는데 숨을 헐떡이며 계단을 오른다.
드디어 내 눈 앞에 펼쳐진 적성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은 이 성을 쌓느라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
우리가 타고 온 버스가 아주 작게 보인다.
부지런한 이들은 벌써 적성 위에서 다른 곳을 감상하고 있다.
나는 멀리서 줌으로 당겨 사진만 찍고 있다.
빨리 오라는 호각소리에 황급히들 내려온다. 겨우 올라갔는데 뒤돌아 내려오는 이의 불평이 들리는 듯하다.
여기저기서 멋진 사진을 찍으려 애쓰는 이들이 보인다.
문화재 답사를 온 어린이들이 보인다.
단양신라적성비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엉겅퀴
하늘거리는 나비도 한 마리 잡아 본다.
이제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가야 한다. 내리막길은 오르막길보다는 수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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