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스리는 글/좋은 글

식민지의 국어시간-문병란

무지개_느티 2009. 10. 7. 11:20

식민지의 국어시간

문병란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 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말도 글도 성까지도 죄다 빼앗겼던 우리,

       히노마루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의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빰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빰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 시간,

       그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나는 국어 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간다는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 선생이 되었다.

       지금은 하야시 센세이도 없고

       뺨 맞은 조센징 새끼의 눈물도 없는데

       윤동주를 외우며 이육사를 외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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